공연을 위해 차려입은 의상은 배우를 빛(폼)나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특히 서양 것이든 동양 것이든 고전(사극)의상의 화려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단추와 자크가 없던 시절이라 대부분 끈으로 묶는 것이 보통인데
이게 참, 폼날 땐 나더라도 한 번 벗으려면 그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영조를 맡고 속곳에 속속곳, 하의 두 겹에 상의 두 겹
그리고 결정적으로 폼나는 거, 곤룡포와 허리띠, 원류관을 쓰면
그 무게만도 만만치 않지만, 소변 한 번 보기 예사롭지 않은 터라
대부분 화장실 가기를 꺼리거나 아예 꾹 참는 경우가 허다했다.
공연 20분 전,
기다란 수염까지 붙이고 나니 갑자기 아랫배가 요동을 치는 게 아닌가.
시간상 겁날 것이 없었지만
갑자기 온몸에 경련이 일고 뺨에 솜털이 사르르 돋는 것이
딱, 졸도할 지경이었다.
제자들과 후배들이 보는 자리라 표정은 계속 근엄한 척했지만
그 근엄은, 진짜 근엄이 아니라 안면 근육 전체에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였다.
입 벙긋, 얼굴 한 번 잘못 실룩 됐다간 항문까지 열릴 판이니 곤룡포고 뭐고 아작이 날 판이었다.
그래도 나는 분연히 일어섰다.
그러나 머리에 출렁대는 원류관을 까먹고 곤룡포를 입은 채, 나는 아주 조심조심
임금이고 나발이고 체면 따위 다 팽개치고 분장실 바로 옆에 붙은 화장실까지 가는데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긴지, 벽을 붙들고 통사정하며 걸어가는 폼이 영 가관이 아니었다.
아 흑, 쪽팔려.... 나, 임금이야.... 조선 제21대 왕, 영조라구.... 으으으....
드디어 변기 위,
그 질긴 곤룡포가 째지듯 시원하게 배설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엄청 느꼈다.
계엄령 해제.... 그 기분은 정말 만고강산 유람할제였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냐?
화장지가 없다니....
핸폰도 없으니 연락도 못 하겠고, 스탠바이 한다고 모두 무대 뒤로 나가버렸고....
벼라별 꼼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무조건 앞칸으로 가자였다.
두 겹 상의와 곤룡포를 둘둘 말아 왼손에 잡고
잡지 않으면 주르륵 내려가는 바지 두 겹을 오른손으로 잡은 뒤
엉덩이만 내놓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장실 복도로 나왔다.
그놈의 원류관은 왜 자꾸 쏠리고 심하게 출렁대는지....
한 번 상상해 보라.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그게 어디 조선 제21대 임금의 모습인가.
좌우간 앞칸에 무사히 들어온 나는 얼른 화장지부터 찾았다.
아아, 그런데 늬미.... 거기엔 휴지는 없고 그 두꺼운 속 알맹이만 달랑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그 뒤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겠다.
다만, 한 가지 고백하자면
그날 공연 내내 졸지에 나는 치질에 걸린 영조가 돼 버렸다는 사실이다.
특히 세자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이 압권인데
혹시나 무서워서 배에 힘도 못 주고 빌빌대는,
걸음걸이가 약간 요상한 임금이었다.
빌어먹을,
그날따라 인터뷰는 왜 그렇게 줄줄이 하러 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