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그때는 왜

시인 김상훈 2009. 2. 2. 06:47

 

 

돌이켜보니 인간의 운이란 게 참 묘한 장난을 하는 것 같아 때로는 커다란 상실감에 젖기도 하지만, 몇 번쯤 내 생애에 빛날 법한 일들이 살짝 비켜 가는 것을 경험하고는, 내 주위에 준비된 자들이 어둡게 있으면 나는 까닭모를 목마름으로 그들 보다 더욱 조갈증이 나곤 한다. 가난한 예술가의 멋스러움은 이제 낡은 추상이 되 버린 이즈음, 그 추상적인 멋스러움에 안주하기란 현실이라는 놈이 매우 냉혹하고, 그 냉혹한 현실이 섬뜩한 각성을 요구할 때 내가 왜 진작 나와 연을 맺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되도록이면 비굴하지 않게-이미 비굴한 것이지만- 세상과 조금이라도 타협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자괴감에 종종 곤혹스러워질  때가 있다.

 

그것을 굳이 회한이라고까지 말하고는 싶지 않지만, 자기 딸에게 명도와 채도를 설명하고 있는 내 옆에서 자기 딸 운동화를 꿰매어 주는 친구 놈을 바라보며 저 모습이 진짜 아버지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은근 슬쩍 뭉개버리던 것 하며,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이 원한다면 더 큰 사랑으로 당신을 보낼 수 있다는 식의, 퍽 유치찬란한 대사를 아내에게 함부로 내뱉었던 일 하며, 세상의 아버지 혹은 세상의 남편이라는 위치는 까마득하게 잊은 채, 어린 제자들에게 몰리에르와 세익스피어, 브레이트와 스타니슬라브스키를 들먹이며 거나해진 알코올 기운으로 이현령비현령하기 일쑤였던 나는 과연 철이 들면 죽을 것인가. 죽으려면 철이 들어야 할 것인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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