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누란累卵의 벽壁

시인 김상훈 2009. 1. 24. 03:35

 

불문곡직 오마니한테 인사하라우,하는 아버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지청구처럼, 빨간 구찌배니에 파마머리, 까만 핸드백에 뾰족구두의 엄마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오감 전체를 자극하는 내 느낌이 묘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때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내가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알았겠느냐마는 그 느낌 속엔 왠지 그 사실이 틀림 없을 거라는 자기 확신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억지로 인자한 웃음을 띠고 있는 그녀와, 사뭇 고정된 시선으로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나를 번갈아 본 아버지는 강요하듯 재차 오마니한테 인사하라우,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점 두 개를 갖고 그 일대에서 제법 돈 좀 만진다는 과부였다.

함경도가 고향인 그 부자 과부와 졸지에 모자라는 타이틀로 동거에 들어간 나는 그녀를 대할 적마다 반공 시간에 배웠던 빨갱이를 가끔 떠올리곤 했는데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런 의식이나 감(感)은 거의 사라진 대신 차갑고 무관심하다는 느낌이 자꾸 눈덩이처럼 커 가고 있었다. 그녀가 데려왔던, 나보다 두 살 어린 계집아이도, 나도, 친오빠와 친동생이 아니며, 친엄마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감을 잡은 그 깊이와 두께 만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과 벽으로 의붓이라는 의식을 두텁게 쌓아갔다. 이듬해 그 계집아이는 안타깝게 백혈병으로 죽었지만,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오로지 아버지는 친親을 강조하고 주입시키는 것에 만족해하는 듯한 눈치가 역력하였다. 종종 둘 다 무릎을 꿇리고 계모 앞에서 침 튀겨가며 친親에 관한 역설을 했으니까.

어느 날, 지병으로 세상의 연을 끊은 아버지 덕분에 어렵사리 형성되었던 모자간의 끈이 자동 소멸되었다. 모자지간이라는 타이틀 역시 자동 소멸이었다. 내가 안주할 곳은 없었다.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휴학계를 내고 군 입대를 서둘렀다. 혹독한 훈련소 과정을 거쳐 자대에 배치받아 꼬박 36개월을 근무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게 면회를 온 적이 없었다. 새벽기도와 산상기도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그녀,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놓은 집 두 채를 슬쩍 자기 명의로 이전했던 그녀, 아버지가 죽기 전 교묘하게 보험을 들어 보험금까지 타 먹었다는 그녀, 그 일 때문에 친척들 앞에서 고모로부터 똥바가지 세례를 받았다는 그녀, 그런 그녀가 나를 위해서 딱 한 번 대성 통곡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훈련소에 입소한 뒤, 군에서 보낸 내 옷가지와 신발을 가슴에 부여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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