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도지기를 퍽 잘했다 싶었다. 작품이 끝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병 때문에 간혹 쫑파티 자리에 참석한 의미가 무색해질 정도로 휑~한 공간을 만들어 버리곤 얼른 자리를 뜬다. 덕분에, 오늘 참으로 멋진 여자를 만난 게 아닌가 싶다. 간절곶 근처 해변에, 통나무집 카페의 드넓은 창이 두 눈에 쏙 들어 무작정 들어갔다.
긴 퍼머넌트에 시원한 이마, 그 위에 까만 선글라스가 해골 눈알처럼 얹혀 있었다. 맞은편에 자리한 그녀와 시선이 자주 마주칠 때마다 고리타분하고 번잡한 번뇌는 사라지고 지극히 간단명료한 산술적 본능이 꿈틀댔다. 그러니까 저 여자도 내가 마음에 있으니까 자꾸 나와 시선이 마주칠 거라는 따위의 계산이었다.
누가 화살이고 과녁이든 그런 틀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듯, 감춰진 자신의 육감적인 몸매를 휘휘 감기는 옷감으로 실루엣 처리하는 행위가 다분히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필요 이상 내 시야 안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그 순간 나는 왜 변의를 느꼈을까. 실루엣이고 뭐고 일단 화장실부터 갔다.
화장실 심리는 누구나 똑같다. 아무도 없다 싶으면 마음 놓고 퍼지르다가도 누군가가 새로 전입신고를 하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특히 위와 대장 사이에 동맥경화가 생기면 아랫배가 몹시 아파 괄약근은 오토매틱으로 힘이 가해진다. 한참 압력 조절을 하는 차에 멀리 복도에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콧노래.... 또각또각.... 점점 커지더니 드디어 내 앞 칸 문이 우당탕 열리곤 매우 급한 동작으로 윗옷 올리기, 아래옷 내리기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동시에....
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삣~! 삐릿~!
거의 생자 배기 광목 두 겹쯤 겹쳐서 한 번에 힘껏 째는 소리가 화장실 전체를 휘돌아 벽을 타고 내 등줄기를 강타했다. 절정에 이른 카타르시스의 처절한 절규, 그런데 끝에 삣, 삐릿은 뭐람.... 아하, 여진이군.... 괄약근의 여진.... 나는 찔끔거리며 나오는 소변과 대변을 막기 위해 엉덩이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여진이 멎자 이젠 그녀의 노래가 이어졌다.
그 누가~ 나를~ 사랑~ 한다고오~ 해에도~
이젠~ 사아랑에~~ 불꽃~~ 태울 수 없네~
(이때 무슨 신호가 오는 모양이다)
슬~으으으으 픙~~(괄약근에 힘주고)
퓨후~~ (힘 빼고) 내 사랑~~ 바람에~~
흐흐흐흩, 흩,~ (다시 힘주고)
아후~~ (힘 빼고) 날리더니~ 뜨거운 눈물 속으로~~
아으으으으~~~~ 다시 힘주고....
빼고.... 부르고.... 빼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늬미럴, 그냥 똥을 누든가 아니면 노래를 부르지 말던가. 아주 날 죽여라, 죽여. 엉덩이 계엄령이고 뭐고 나는 아예 시체가 된 채 거의 숨을 못 쉴 정도였다. 당최, 도무지, 무조건, 하여간 내 이 여자 상판대기를 꼭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후다닥 나온 나는 앉았던 자리로 돌아와 먼 시선으로 화장실 통로를 주시했다.
또각또각.... 허걱.... 그 여자.... 그 육감적인 여자.... 안젤리나 졸리 같던 여자.... 폼 잡고 피우던 담배를 딱 한 모금 빨곤 재떨이에 쑤셔 박았다.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황망하게 그 자리를 떴다. 바닷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절대 남의 여자를 절대 넘보지 않겠노라고....
요즘도 나는
종이 찢는 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그 환청이 들릴까 봐.
시몬, 너는 아느냐.
광목 두 겹 찢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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