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빛 몰캉한 수면 위에서 잦바듬하게 살강대는 찌. 무심한 바람결에 연초록 수초가 물 비늘이라도 만들라치면 소위 낚시꾼이 아닌 자칭 조사(釣士)들께서는 "한갓진 느긋함"에서 느닷없이 확장되는 동공과 함께 슬금 "은근한 초조함"으로 뒤바뀐다. 민물낚시는 낚시 축에도 못 낀다고 입에 거품 무는 조사 입장에서는 엄연히 바다낚시가 존재하는 터이니 그러한 거품 정도야 애교로 봐 줄 수 있다지만, 조행길 내내 낚시란, 조과(釣果)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도(道)의 경지에 이르는 "낚시질"이기에 마릿수와 크기에 연연하지 말라며 험험거리던 조사도 바람결에 잠깐 움찔거리는 수초에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장광설이 왠지 나는 마뜩찮았다.
그런데 정말 머리에 털 나고 내 생에 최초로 낚시를 한답시고 떠난 십수 년 전의 입장에서는 당연 조도(釣道)라는 문구가 현장에서 끓이는 매운탕처럼 구미를 당겼고, 설령 온종일 꿈쩍도 않는 찌를 바라보며 간간이 허엿한 한숨을 내리깔며 "아, 니미럴"을 연발한다손 쳐도 마릿수와 크기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조사로써 지녀야 할 품행이 방정한 것이라면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 쪽에 무게를 두고 조과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낚시질을 해야 할 판이었다. 필시 그것은 빈 바구니에 아, 니미럴과 허엿한 한숨만 잔뜩 채우고 돌아갈 객쩍은 귀로를, 첫 조행의 서투름을 빌미로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둔갑시킬 안전장치이며 능갈맞은 술수였으리라.
희곡이라도 한 편 써볼까, 라는 꼴 같지 않은 핑계를 대고 조행을 떠날 때 그지없이 선량한 아내는 그 적의 형편상 감히 내놓을 수 없는 용돈을 손에 쥐여주며 순한 눈을 끔벅였다. 그날의 일행은 목욕탕 때밀이 박씨, 이발소 이씨, 한물간 제비 고씨, 자칭 시인인 최군과 나였다. 그러니까 바다낚시 예찬론자는 박씨였고 조도를 주창하는 이는 늙은 제비 고씨였다. 창원 어디쯤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그들의 무용담은 끊이지 않았다. 경상도 말로, 귓구녕이 다 송실시러울 정도로 떠들던 끝에, 어탁(魚拓)을 뜨되 가장 큰 놈을 잡은 조사에겐 갹출해서 상금을 주자고 했다. 상금이라는 말에 도(道)니 바다낚시니 따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 당하는 낌새였다.
조탐(釣貪)을 물욕이나 집착 중 어느 편도로 봐야 할지 참으로 애매했다. 물 비늘 간지럼 사이사이 훈풍에 묻어오는 비릿한 내음이 조사들의 콧구멍을 살살 후벼 팔 때 나처럼 첫 행의 낚시꾼은 오히려 덤덤하지만, 증면된 바 없는, 아니 증명할 수도 없는 조력(釣歷)을 마구 휘갈겨 쓴 박씨와 고씨는 그들이 펼쳐 놓은 수십 개의 좌대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스스로 존재의 가벼움을 드러내 보이곤 했는데 바다낚시가 여의치 않을 땐 간혹 간식으로 민물낚시를 한다는 박씨와 여자 낚기와 고기 낚는 것으로 도를 깨우쳤다는 고씨와의 조력을 건 한 판 싸움에 최군과 나는 얼뜨기 조사답게 주둥아리 꽉 잠그고 무심하게 낚싯대나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최초의 전율이자 태초의 몸부림을 느낀 건 새벽이 군청색으로 한참 무르익을 때였다. 바다낚시의 달인과 조도(釣道)를 깨우친 그들조차 형편없는 조과를 과시하는 판에 나 같은 얼뜨기가 무슨 조과가 있으랴마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낚싯대만 휘휘 늘어질 뿐 끄떡도 않는 놈이 그쯤에서 딱 걸려들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욕심이 났다. 그들 모르게 낚아올려 모두 놀라게 해 줄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정말 조금씩 조금씩 줄을 당겼다. 등은 온통 땀이었다. 줄이 끊어질 듯하면 조금 늦췄다가 당기기를 수십 번,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 쑥 올라왔고 내 입에서는 기호가 분명치 않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그날의 어신(魚神)은 정녕 나의 편인 듯했다.
커헉,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태초의 전율이, 직립원인에게 반항하는 어신의 그 몸부림이, 빌어먹게도 배퉁이 속에 진흙과 물이 잔뜩 고인 커다란 장화였다니. 아아, 니미럴! 어쩐지 더럽게 무겁더라 했다. 그러니까 전율, 몸부림이 어쩌고 했던 느낌은 순전히 나 혼자만의 호들갑이었고 얼뜨기 조사로서 그 무지스러움과 방정맞음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었다. 40센티 정도의 크기인 장화를 어탁(魚拓) 대신 장탁이라는 말로 둔갑시킨 일행은 그날 소주 일 잔에 매운탕은 일단 제쳐놓고 한지에 장화를 콱 떠버렸다. 열렬 조사들껜 참으로 죄송하지만, 그날의 첫 조행 이후, 나는 지금까지 낚시를 가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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