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상경기

시인 김상훈 2009. 1. 12. 05:54

#1./ 상경 첫날

여행처럼 낯설고 신비로운 것이 어디 있을까, 라고 누군가 말했다. 굳이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일이 아닐지라도 그러한 표현은 신기하게 맞아떨어진다. 더구나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목적이 겹으로 정해지면 떠나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전날처럼 마음은 몹시 달뜨기 마련이다. 이번에 어김없이 나는 그랬다. 그처럼 달뜬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을 때 딩동댕, 기계음을 내며 승무원의 안내방송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2./ 합정동 저녁

이번에는 기필코, 낯설어도 절대 낯설지 않겠다는 각오였지만 어디서 몇 호선을 타고, 어디서 몇 호선을 갈아타라는 지령을 받았을 때 나는 거대한 미로 속을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 더럭 겁부터 났다. 방향 치도 아니고 수 치도 아닌데 유독 서울만 오면 갑자기 모든 치가 돼버리는 이유가 뭘까. 약속장소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을 통화하고 나서야 친구들이 있는 장소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이도 모였다. 애초에 스무 명 남짓이라고 들었는데 어림잡아 사십여 명은 족히 될 인원이다. 썩을 놈들, 많이도 왔고 얼굴 면면이 많이도 늙었다.

#3./ 토요일 오후 인사동 커피숍 [하루]

잘 다녀오세요, 라는 쪽마루님의 문자와, 형~ 서울 추위는 여기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니 옷 단디 입고 가라던 깊은강 아우님의 마음 씀씀이가 토요일 오후 그 썰렁한 기온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았다. 친절하게 모닝콜까지 해주고 낯선 타인이 아닌 낯익은 얼굴로 마주친 미나리아재비님을 보면서 쬐끄만 여자가 참 예쁘게 생겼네, 라고 주술을 외우듯 나는 중얼거렸다. 선약 때문에 먼저 일어나야 한다며 슬쩍 책 한 권을 건넨다. 선물이란다. 장영희 에세이 [내 생에 단 한 번].... 다음 날 새벽 기차 안에서 이 책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항상 묵언 수행 중인 것 같은 일원님과 정게의 남자 천사 무잡님이 먼저 도착하면서 미나리아재비님과는 자연스럽게 교체가 된다. 곧이어 예의 빙긋빙긋거리는 웃음을 띄우며 나타난 푸른호수님, 그날의 인연들과 해후의 선을 연결해준 성의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하루라는 커피숍에서 나온 일행은 인사동에서 정게 식구들의 아지트 격인 [함께 있어 좋은 사람]으로 발길을 옮긴다.

#3./ 정게 아지트- [함께 있어 좋은 사람]

무려 세 시간 동안을 기다렸다는 코란도님과의 긴 긴 포옹이 이루어진다. 포옹하는 동안 우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그저 등만 토닥였을 뿐. 뒤이어 보면 볼수록 은근히 매력적인 소영님, 처음 대하지만 그간 많이 궁금했던 윤슬아빠님, 윤문식 연극 선배의 어투, 표정과 매우 흡사한 가롤로님, 늘씬한 몸매와 선 굵은 얼굴로 사람 좋아 보이는 강고기님, 동안의 모습으로 나타난 언어의 연금술사 사강님, 무슨 발표회도 아니고 토론장도 아니니 우리는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로 소위 1차를 마무리 진다.

약속은 있었으되 끝내 불발로 그친 길모아님과 구요성님, 그리고 미처 직접 연락이 안 됐지만, 꼬리 글로 혹시나 했던 5405님과, 집 안에 매우 고귀한 손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발길을 접고 대신 전화 통화로 인사를 나눈 곰치님과의 해후는 천상 훗날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4./ [풍금이 있는 집]

우리는 풍금 반주에 맞춰 전통가요와 동요를 목청껏 불렀다. 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어디선가 기타 한 대가 공수돼 왔다. 짐작건대, 누군가가 통기타라이브를 듣자고 한 듯싶다. 어쿠우스틱을 사용하는 나로선 클래식 기타가 조금 부담이 되고 시스템 없이 정말 [쌩]으로 부르는 것이 더욱 부담이 컸지만 나는 왜 그 순간 문득 길모아님도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까. 27년 동안 기타를 두드린 죄밖에 없다던 그의 짤막한 글이 왜 자꾸 떠올랐을까.

노래를 부르기 전 나는 다시 한 번 세상이 좁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거기서 하필 정지영 형(감독)과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오. 수백억 짜리 영화 한 편 제작이 어찌어찌 무산될 때 형과 나와의 인연은, 그저 단순한 구도 관계인 배우와 감독으로서 끊나는 줄 알았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될 때마다 배우들을 대동하고 포차 툇마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형.... 몇 년 뒤, 그가 찍으려던 영화와 매우 흡사한 내용의 [화려한 휴가]가 극장가에 상영됐을 때 가슴 졸였을 그보다 내가 더 억울해 하던 기억.... 언제부턴가 소식이 끊기더니 몇 년 동안 치열하게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는 소문만 들었다. 그런데 정말 꿈같이 만난 것이다.

상아의 노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일곱 송이 수선화, 길잃은 사슴, 꽃반지 끼고, 겨울나무, 엄마야 누나야 등등을 앵콜송으로 불렀다. 건너편 손님들이 더 난리다. 정게 식구들과 정지영 형과의 수인사가 이어졌다. 형과 작별 인사를 하면서 훗날을 도모하자는 전갈을 주고받는다. 풍금 집을 나선 우리 일행은 통수를 열심히 굴리다가 몇몇이 가야 한다고 하기에 여기서 그냥 가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나의 으름장에 제일 먼저 가겠다던 사강님이 얼른 나, 상훈이 형하고 적 안 할래. 무섭고 더러워서 따라갈래 한다. 가야 한다고 궁시렁대던 몇 사람이 입을 꾹 다문다.

#5./ 일원화백 작업실

바깥 기온은 엄청나게 쌀쌀했지만, 왠지 작업실은 안온했다. 아무리 추워도 한 칸만 사용한다는 가스난로 불을 오늘 특별히 세 개를 켠다고 화가는 너스레를 떤다. 벽에 붙은 그림들을 바라보며 한결같은 염원이 생긴다. 제발 그림이나 잘 팔려라. 감자탕과 해물탕을 시키니 뭐니 하다가 그래도 쐬주엔 라면이 최고 아닌감 하는 바람에 졸지에 막내가 된 된 윤슬아빠님과 소영님이 부리나케 심부름을 간다. 소영님은 집이 근처라고 막중한 임무가 추가된다. 라면 끓일 냄비와 기타도 들고 오라고. 특식 돼지불알(?), 꽁쳐둔 과메기, 40일 됐다는 마른 오징어만 거절 당하고 아주 거덜을 낸다. 사강님의 입담이 쏟아진다. 그날따라 일원님보다 소영님이 더 묵언 수행 중인 것 같았다.

#6./ 첫차

말수가 적은 강고님이지만 서울역 대합실 의자에 앉아 뜨거운 캔커피를 홀짝이며 그는 제법 많은 얘기를 내뱉는다. 많은 위로, 많은 다독임을 들으면서 현우님의 근황도 엿듣는다. 현우님에 대한 애정이 그의 말에서 절절이 묻어난다. 아아,ㅡ 선한 사람들.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우리 언젠간 다시 만나리. 라고 나는 뇌까린다. 승차권을 들고 넓은 창가에 앉자 반사되는 실내등 때문에 바깥엔 동일한 실내와 동일한 인물이 마치 마주보는 것처럼 공중에 떠서 차창에 되비친다. 그리고 그 동일한 인물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서울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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