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 음성으로 내려앉던 가을 햇살이 사라지고 잎을 떨어버린 미루나무가 하늘을 담고 있다. 퍽 오래전, 꼭 이런 때였으리라. 뒷짐을 지고 걷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 역시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성큼성큼 걸어라~~!" 하는 할아버지 말에 무슨 구령이라도 맞추듯 "느릿느릿, 성큼성큼 걸어라~~!" 하면서 할아버지 꽁무니를 따라 기억이 분명치 않은 둑길을 걸었었다.
학교도 안 들어간 코흘리개 손자 놈이 할아버지를 흉내 내는 것이 귀여웠던지 앞서가던 할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잠시 서서 하늘을 살펴보더니 작은 소리로 헐헐, 거리는 듯싶었다. 일 미터 남짓 뒤에 서 있던 나 역시 때를 놓치지 않고 하늘을 살펴보곤 헐헐, 웃었다. 그때 웃음을 참느라 할아버지 어깨가 심하게 들썩였다. 가당찮은 흉내 내기에 당신께서 몹시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
뒷짐을 졌지만, 배가 워낙 커 앞이 불룩했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에게 질세라, 나도 뒷짐을 진 채, 없는 배를 한껏 내밀곤 할아버지 흉내를 냈다. 뜨거운 국물을 마실 적 마다 "어~~ 시원하다~~!" 하는 것을 보곤 할아버지 어투를 그대로 흉내 내다 된통 혼이 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 실종된 가을처럼 그때 나는 겁을 상실했던 듯싶었다.
엷은 회색빛으로 휘장을 두른 듯한 꿈 속의 사위는 저녁나절이었다. 둑 양옆에 사방으로 널브러진 논마다 볏짚 태우기로 연기가 가득했다. 바람은 조금 쌀쌀했지만, 어디선가 구수한 밥 냄새와 김치찌개 냄새가 연기 사이를 뚫고 쌀쌀한 바람에 묻어와 구원의 종소리처럼 느껴졌다. 먼발치, 정금이 누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는 탱자나무는 거의 가시만 남긴 채 만추와 별리를 고하고 있었다.
어젯밤, 나는 왜 이렇듯 생생하고도 아릿하면서 생뚱맞은 꿈을 꾸었을까.
그리운 시냇가- 아다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