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가을 한 복판을 지날 때

시인 김상훈 2007. 10. 20. 21:41
초등시절 군발이였던 아버지의 발령 때문에
강원도 오지에 몇 년 쿡 처박혀 살던 때가 있었다.
깐엔, 도회지 놈이라고 학교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이들 역시 어딘가 꾀죄죄한 모습 때문에
심히 건방지게도 한동안 거리를 두고는 사귀기를 꺼려했다.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에 메뚜기를 잡으러 간적이 있었다.
강아지풀에 한 놈씩 꿰차는 재미로 해지는 줄도 모르고 사방을 쏘다녔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나는 사냥 솜씨가 영 말이 아니었다.
제법 스산한 기운이 돌던 때였지만 몸은 온통 땀 투 성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강아지풀에는 메뚜기가 꿰이다 못해
잘 익은 벼이삭처럼 줄기마다 빼꼭하게 메뚜기가 사냥질 당해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손에 쥐어준, 메뚜기가 잔뜩 꿰인 강아지풀....
던지다시피 손에 덥석 쥐어주고는 줄행랑을 치듯 도망가던 아이는
그의 어머니가 팔을 다쳐 곰배팔이라고 늘 놀림을 당하는 여자애였다.
그리고 약속이나 하듯 순식간에 사라진 아이들....
텅 빈 들녘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자니 묘한 고요가 침잠했다.
까닭모를 외로움이었다.

마을 구석구석에선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사위는 약간 어스름했지만 그 아이의 집 뒷뜰에 농익은 탱자나무 한 구루가
너도 빨리 집으로 가라는 듯한 느낌으로 보였다.
훗날 이러한 광경은 화가들의 그림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 뒤로....
아이들과 나는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겨울엔 논바닥에 얼어붙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고
봄이면 앞산 뒷산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와 개나리에 정신이 팔려
먼 산 마다하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여름 하교길엔 아이들과 어울려 맑고 투명한 도랑물에 멱을 감곤 했는데
일명 벤또와 책보따리와 검정고무신을 풀어놓은 곳은
그 아이들과 나와 꼭지점을 찾았다는 증표였다.

점점 시골아이가 되가던 어느 여름....
갑자기 서울로 다시 발령을 받은 아버지 때문에 식구들은 짐을 싸야 했다.
그때 나는 죽어도 서울엔 가기 싫다고 패악을 부렸는데
도시 아이들 보다 훨씬 순진무구하고 때묻지 않은
그곳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무엇보다도 싫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어린 내가 무슨 힘이 있으랴....

군용 트럭에 이삿짐을 잔뜩 실고 마을을 떠나던 날,
동구 밖까지 뜀박질하면서 따라오던 아이들....
그 얼굴 새카만 아이들의 모습이 서울에 도착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렇게 가을 한 복판을 지날 때쯤이면 한 번씩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 아이들도 지금은 모두 중년이 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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