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나의 애마 로시난테

시인 김상훈 2009. 5. 18. 03:29

 

오만한 외제차도 슬금 피하는 거의 흉기에 가까운 외형, 1994년 나의 애마 때문에 지성인 체면 세우는 꼴값도 이젠 이력이 나서 징글징글하다. 묘하게, 운전석 방향이 모두 그렇다. 와이퍼 작동 미지수, 툭하면 눈알처럼 빠지는 방향지시등은 투명 테이프로 막았고, 발통에선 언제부턴가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겁나게 들린다. 여차하면 바로 주저앉을 낌새다. 어디 그뿐인가. 에어컨과 히터 두절로 한여름엔 한증막이요 한겨울엔 냉동창고다. 덥다고 뒤 창을 내리면 그날로 끝이다. 절대 안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여, 객이다 싶으면 나는 그가 누구던 애절하게 신신당부한다. 아무리 더워도 열지 말라고.

 

그런데 나의 체면을 정말 무지막지하게 구기는 일은 나의 로시난테가 아무 이유없이 가끔 멈춘다는 거다. 이게 정말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고속도로에서 멈춘 적도 있었는데 쏜살같이 달리는 차량 숫자만큼 나는 그날 뒈지게 욕을 얻어먹었다. 올봄, 친구 부부를 데리고 달맞이 고개를 넘어 청사포로 가던 중, 달맞이 고개 8부 능선쯤에서 차가 갑자기 푸드덕거리다 딱 멈추었다. 나는 이럴 때 긴급처방법을 잘 알고 있다. 무조건 보닛을 열고 아무 데고 발로 들고 차면 정말 귀신처럼 차가 움직인다는 거다. 혼비백산할 줄 알았던 친구 부부는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곤 차 속에서 끅끅, 킬킬대며 널브러졌다.

 

지난가을, 이와 같은 로시난테의 정체를 까맣게 모르고 한 차 가득 몸을 실은 채 반나절을 고개와 고개를 넘나들었던 정게 식구가 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름은 굳이 밝히고 싶지 않다. 다시 그들이 찾아와도 나의 로시난테는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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