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를, 언제부터인가 느낄 즈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 희망을 담보로 하여 절망을 키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화가 없는 내 일상에 대한 자괴감과 청청한 오기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기다림에 지쳐 당신 스스로 이골이 난 탓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당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타인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일보다 몇 곱절 힘들었던 것은, 기다리는 일에 능숙해져 초점마저 잃어버린 당신의 시선을 바라보며 애타게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당신과 정녕 남이 되기 싫었던 까닭은,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를 지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신이 진정 모를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을 어제처럼 여기는 일에 익숙해진 당신에게 난 늘 미안할 따름이었습니다.
꽃잎이 모두 말라 죽을 때까지 꽃에 물을 주기란 어쩌면 지극히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꽃을 피우고자 씨앗을 심고 나무를 키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간 당신과 함께한 시 공간이 설령 부족함과 모자람으로 가득 차 있었어도 나는 당신이라는 텃밭에 씨앗을 심고 나무가 되는 심정으로 살아왔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그런 당신에게 굳이 인연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애써 나의 부족함을 감추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신과 내가 넘어지지 않고 함께 이른 길은, 남들이 뭐라 하든 남들이 전혀 눈치 챌 수 없는 우리만의 절절한 수화 통신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나는 오늘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내 운명의 길섶에서 당신과 우연히 마주친 그때 그날을.
Yesterday once more- 얼후(중국 고전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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