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목걸이와 인연

시인 김상훈 2008. 12. 10. 06:52

손때가 반질거리는 흑단(黑檀)은 크기가 엄지손가락 절반만 했다. 가운데에 옴자 문양이 새겨진 그것은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메소드 연기를 공부하러 구소련으로 떠났던 제자로부터 제법 오래 전에 받은 선물이었다. 올해 벌써 40대 중반이 된 그녀가 네팔에 있다며 메일로 소식을 전하는 끝에, 목걸이는 잘 있느냐고 물었다. 뒤통수에 슬금 식은 땀이 흘렀다.

 

오랜만에 도자기를 굽는 친구에게 갔다. 영양가 빠진 그의 긴 머리칼은 끝이 갈라져 있고 마치 탈색이 된 양 색깔이 황소 빛이었다. 내가 턱수염만 유달리 하얗듯 그는 콧수염만 유달리 까맸다. "씨부리지 마라, 나는 알고 있다"로 인근지역에서 유명한 그가 요즘은 "묻지 마라, 아는 게 없다"로 일관한단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찻집이랍시고 차려놨지만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다.

 

그의 가마로 갔다. 장작으로 불을 지피고 풀무질을 하는 그의 곁에서 콩팔이 새팔이를 찾다가 아궁이에 엎드려 장작 하나를 낼름 넣었다. 불장난 비슷한 것에 재미가 붙어 아궁이를 쑤석대는데 갑자기 목구멍 근처가 불에 데 인 듯 뜨거웠다. 화들짝 놀라 목을 보니 목걸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략 삼분의 일이 탄 듯 싶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고, 스타니슬라브스키가 떠오르고, 구소련이 떠올랐다. 그리고 대략 1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까지. 아아, 늬미럴. 이걸 우짜몬 좋노. 망연한 기색으로 앉아있는 나에게 친구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머시 우째. 고대로 해노모 돼제. 본래 서각이 전공이었던 그의 눈엔 정말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삼일 후에 찾으러 오란다.

 

감쪽 같았다. 이리저리 아무리 살펴봐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친구의 재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의 찻집에서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셨다. 잘 먹지도 못하는 홍탁을 몇 개나 시켜가며 원상복구 값을 치렀다. 친구 놈은 뭔 놈의 홍탁을 그리도 잘 먹는지 원. 삭아도 아주 곰삭아서 나는 숨이 컥컥 막힐 지경인데 놈은 그저 게 눈 감추듯 꿀꺽꿀꺽 잘도 넘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나는 계속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느낌이 이상해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봤다. 그렇군. 어쩐지 느낌이 예전 같지 않더라니. 교묘하게 살을 붙힌 부분이 어딘가 미세하게 껄끄러웠고 반질거리던 손때가 그 부분만 사라진 게 아닌가. 겉표면에 유약을 발라 광택까지 냈건만 감촉으로 느껴지는 그 반질거림은 아니었던 것이다.

 

섹소폰 연주자를 오랫동안 애인으로 삼고 지내던 여류화가가 있었다. 이승을 떠난 지 이 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슬픔에 쌓여있는 그녀는 요즘도 하얀 링거와 노란 링거에 의존하고 산다. 여기서 링거란 소주와 맥주를 일컫는다. 손전화기가 울리고 주점, 이별의 부산정거장에서 보잔다. 앉자마자 권 커니 잣 커니 하다가 그녀의 눈물로 1부가 끝날 즈음, 내 목걸이에 그녀의 시선이 계속 고장되고 있었다.

 

주랴. 응, 나 줘. 그 사람이 차고 있던 목걸이하고 너무 똑 같아. 나는 두 말도 않고 그녀에게 벗어주었다.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인연이란 이런 거라고. 더러는 이렇듯 배신을 하는 거라고. 제자와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목걸이는 새로운 인연을 찾아서 갔다. 누군가 보내줘야 인연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잖은가.

 

그런데 이 느닷없는 안부 묻기가 얼마나 황당한가. 목걸이 잘 차고 계시죠? 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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