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코스모스꽃밭처럼 아름답게 흔들린 생일선물

시인 김상훈 2008. 1. 26. 05:02

파란 은박지에 정성이 담긴 손길로 두 겹을 쌌다.

그 겉에 서로 다른 색깔의 줄로 예쁘게 리본을 달았다.

느낌에, 책 같았다.

 

"선생님-, 죄송해요."

 

하면서 내미는 손엔 왠지 계면쩍음과 부끄러움이 묻어 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을 받아 불쑥 던진 내 말은,

햐~ 거 포장 한번 거창하다였다.

 

나에겐 확실한 버릇이  두 개 있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으면 뒤통수에 땀이 나고

작은 선물에 너무 정성이 담겨 있으면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는 뜻이지만

그것은 마치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고 할 때

애처로운 마음을 넘어 괜히 화가 나는 현상과 동일한 반응이랄까.

 

오늘도 그랬던 듯싶다.

책 한 권에 들인 마음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처럼 내 생일을 기억하곤 주신(酒神)을 권하는 제자들보다도

문자와 전화 한 통으로 땜빵을 해치우는 내 자식들 보다도

친구 딸이 선물한 책 한 권은 나에게 감동 그 자체였다.

 

리본을 풀고, 포장지가 아까워 찢어지지 않게 살며시 뜯었다.

2008년 제 32회 이상문학상작품집 대상 수상작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 였다.

[사랑]이라는 명사보다는 [믿다]라는 타동사에 마음이 더 쏠리는 제목이다.

페이지를 뒤로 다 넘기고 그녀의 수상소감부터 본다.

 

---- 그래, 나 잘 쓴다 생각하는 순간 피식 거품이 꺼지고 무언가 바싹 옴츠라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틈만 나면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제가 글 앞에서는 흡사 벌레와 같다고 느낍니다.

        그깟 꼬물꼬물한 벌레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채찍질을 한들 얼마나 빨리 갈 수 있겠습니까.----

 

코스모스꽃밭처럼 아름답게 흔들리고 싶다는 권여선의 문학적 감수성처럼

오늘 나에게 선생님 죄송해요 하면서 계면쩍어하던 친구 딸의 앞날이

코스모스꽃밭처럼 아름답게 흔들리며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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