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할머니의 화투

시인 김상훈 2007. 12. 16. 03:11
 

살아생전, 가족과 민화투나 육백을 치시던 할머니는

언제부턴가 고스톱의 대세에 밀려 홀로 화투를 즐기셨다.

갑오 맞추기와 패 뜨기....

화투 숫자가 9가 되는 것과 그날의 운세를 보는 것이었다.


식사, 화장실, 세면, 취침을 뺀 나머지 시간을

온통 그 놀이에 사로잡혀 손에는 늘 화투가 쥐어져 있었다.

처음엔 그저 그러다 말겠지 했다.


도가 지나친 것 같아 식구들의 핀잔이 늘고

나중엔 화투를 숨기다 못해 아예 없애기도 했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덜컥 자리에 누우셨다.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던 할머니는 이렇게 말을 했다.


"너희들은 젊어서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건 할 수 있지만

나는 이제 늙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내 손에서 화투를 없애는 건 효도가 아니라 불효다.

말만 앞세우는 너희들 보다 화투는 말없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할머니의 관속에

새 화투를 사서 곳곳에 넣어 드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손에 들고 계시던 화투도 넣어 드렸다.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면서도 귀퉁이는 까지고 색이 벗겨진 화투였다.


현재의 희망과 고통을 할머니의 화투로 생각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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