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사진

애증의 그림자들

시인 김상훈 2007. 7. 20. 03:54

 * 안톤 체홉의 [갈매기 안녕] 공연中에 (주연을 맡았던 제자와 함께)

 

 

재작년 겨울 끝 무렵----,

극단을 나서면 하루 종일 바다는 으르렁대고 있었다.

겨울바다라는 그럴듯한 운치에 걸맞게

바바리코트 휘날리며 폼 한 번 잡는 사람조차 없는

매서운 칼바람이 자진모리로 춤사위를 벌리곤 했다.

 

작은 전기 곤로를 가운데 두고 옹기종기 둘러앉은 우리는

오늘 공연 쫑 내고 쏘주나 한 잔 할까, 로 온갖 통수를 재고 있었지만

공연시간이 임박해 그 휑뎅그레한 사위를 뚫고

극장을 찾아오는 몇 몇의 쌍쌍이들 덕분에 억지스럽게 무대에 오르곤 했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行하면 실수가 잦은 법....

누군가 대사를 까먹는 바람에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능숙한 연기자들이야 소위 애드립이라는 것을 곧 잘 구사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배우들은 거의 정지 상태가 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게 된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리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가는지....

연습부족, 자만심, 매너리즘에 대한 자성의 껍질들이 바닥을 어지럽힌다.

그럼에도 어찌 어찌 공연은 이어지고 커텐 콜을 할 무렵이면

인사하는 머리통이 몹시 욱신거렸다.

 

침통한 표정으로 분장실에 들어오는 연기자들....

필시 집합 한 번 당하고 옥상 어디쯤엔가 불려갈 어린 후배들은

그 또래의 선배들에게 곤욕을 치룰 건 빤한 이치였다.

이때 대선배나 선생이라고 나서면 안 된다.

 

공연 중간에 찾아온 친구 덕분에 우리는 모두 돼지갈비 집으로 향한다.

친구는 그날의 독지가이며 단원들에겐 구세주나 다름없는 존재로 변한다.

소주 몇 병이 오가는 사이 조금은 취한듯, 조금은 간이 부은듯한

새카만 후배 한 명이, 소리높여 요점이 분명치 않는 항변을 한다.

 

그러다 끝내는 까닭모를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운다.

이때에도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다.

비슷한 또래의 배우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눈물을 훔치거나

복받치는 서러움을 지그시 억누르곤 소리죽여 운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그 눈물의 의미를 나는 누구보다도 항시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옥상에 불려가 호되게 곤욕을 치룬 것에 대한 분함도,

공연중에 대사를 까먹어 선후배들에 대한 죄스러움도,

그로인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도 아니었다.

 

연극이라는 장르가 안고 있는 묘한 애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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