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속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대사들이 한숨처럼 날아가는 날은 어김없이 출연료를 받지 못한 날이다. 그런 날엔 의례 가슴막염을 앓듯 형편없이 구겨진 몰골로 포장마차 툇마루에 앉아 형편없이 구겨진 채 나는 공허하게 술잔을 비운다. 빈 술잔에 술을 채울 때마다 종종 쓴웃음이 나오는 건 비(非)웃음이 아니라 비(悲)웃음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 휴지통에 버려진 대본, 그러나 집행유예를 받은 연극은 곧 아나키스트가 된다.
예술은 배고파야 한다는 논리에 있어 그것은 어쩌면 가진 자의 자기변명이거나 없는 자의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배고픔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의미는 항상, 분명히 따로 있다. 그런데 자꾸 비(非)웃음이 아닌 비(悲)웃음이 나오는 까닭은 어째서일까. 들이키는 술잔을 한 번씩 쳐들곤 다시는 연극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한다. 때로는 사랑이 지겨울 때가 있는 것처럼 예술은 지겨움을 넘어 아주 엿 같을 때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술을 비우고 일어설 때, 아아! 썰물처럼 잠시 사라졌던 이 빌어먹을 연극은 다시 해안가의 바람을 타고 해일처럼 또 나를 덮친다. 그렇게 내 인생의 절반이 지났고, 전부가 지났다. 때로는 고해성사를 하듯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처음엔 네 몸속에 흐르는 피 때문에 시작했다 쳐도 이제 나이 들어 뾰족하게 달리 할 일이 없어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러나 어차피 죽을 때까지 안고 갈 고독이라면 간혹 비틀거릴지라도 주저 앉지는 말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김상훈의 낡은 수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가루 반죽 재도전 (0) | 2009.03.03 |
---|---|
길 (0) | 2009.03.02 |
계절에는 냄새가 있다 (0) | 2009.02.26 |
산사가 쓸쓸한 이유 (0) | 2009.02.24 |
순전히 잣대겠지만 (0) | 2009.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