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소원 빌기

시인 김상훈 2009. 2. 10. 08:55

 

 

기왕이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빌자고 했다. 우리 집 옥상에서 바라보던 달님과 달맞이 고개 정자 안에서 바라본 달님은 사실 별 차이가 없었지만, 애써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곳까지 가자는 아내의 투정에 못 이기는 척하고 나는 똥차를 끌고 내달렸다. 아내를 위하여 고물 카세트 볼륨을 한껏 높이자 계면쩍게 내가 부른 "꼬마인형"이 차 안을 휘돌았다.

보름달이 어디인들 환하지 않으랴. 그러나 아내와 북새통을 이루는 사람들은 사뭇 다르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정자 너머 하늘 높이 둥실한 박꽃이 하나 떠 있었다. 바다는 그 빛에 화답하듯 마치 금빛 같은 은어 떼가 출몰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면, 하늘에는 바람꽃 같은 억겁의 차크라가 빛나고 있었다. 박속같이 희디흰 달빛 아래 합장을 하고 무언가 수없이 비는 아내의 모습은 반백의 머리칼로 더없이 하얗게 보였다.

돌아가는 길에 아내는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보여주며 산꼼장어 한 접시를 안주로 구워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소심하게, "거, 장사도 잘 안된다면서 무신...."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무척 궁금하였다. 도대체 아내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손이야 발이야 빌었을까. 우리의 일상이 늘 그렇듯이 묻지도 않았지만, 아내도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달님아, 이승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다음 생에 태어나거들랑 나 같은 놈 만나지 말고 우리 마누라 제발 행복한 여자로 태어나게 해주라"

나의 소원 빌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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