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알 수 없는 무대 세트와 바로 코앞에 펼쳐진 객석은 가상과 현실이 뚜렷하게 이분화되지만, 무대 위의 "그 어느 때" 와 "현실"은 곧 그러한 괴리감을 떨치고 "그 어느 때'로 날아간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나는 대략 달 반을 "그 어느 때"의 세계에서 칩 십 대 노인으로 살아온 듯싶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지역문화)의 영역은 낙후된 토양을 면치 못한 채 겉모습만 공룡처첨 보인다. 마침 뮤지컬 "캐츠"가 대극장에서 매표 하고 있던 터라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심하게 다가왔다. "어디 한 두 번 겪는 현상이랴."라는 말로, 우리는 분장실에서 자조 섞인 자위를 일삼지만, 십삼, 사만 원짜리 "캐츠" 티켓은 매진, 이만 원짜리 "느낌, 극락 같은" 티켓은 거의 초대로 메꿔지고....
이러한 현상은, 서울에서 내려온 극단과 맞붙어도 매한가지다. 가끔, 쌍코피 터지고 올라가는 극단도 있지만, 대부분은 압승을 거두고 올라가기 예사다. 똑같은 작품임에도 유명배우 몇 명 포진시킨 서울팀과 맞붙으면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때로는 그들 틈에 낀 후배들이 분장실로 찾아와 형 혹은 선생님, 죄송합니다. 라는 인사를 건네곤 한다. 우리는 서로 무슨 뜻인지 잘 안다. 하여,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방법은, 오로지 죽기 살기로 연기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잊지 않고 찾아준 관객들에게 배우로서 최대한 예를 갖추는 길이기도 하고 충분하게 연습을 하지 못하고 올라간 배우로서의 양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공연,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사라지는 세트를 보며 배우들은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 눈물의 의미를 나는 너무 잘 안다. 쫑파티에서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배우의 몸짓과 소리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빛과 소리는 저편 우주의 어딘가로 날아가 저장된다."
모든 죄악은 인연 맺기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연습 때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 심기가 편하질 않았다. 허나 어쩌랴. 인연이란 어차피 걸러지는 법이며 흥할 때는 호연이지만 쇠하면 절연뿐이 더 있겠는가. 출발은 좋았으나 인연 맺기 과정에서 사고와 개념이 서로 다르면 이해와 포용은 졸지에 두 번째 문제로 안착한다. 따라서 변명보다는 선택에 대한 내 오류를 크게 탓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
공연 첫날, 멀리 강원도에서 커다란 꽃바구니가 배달됐다. 한참 리허설 중에 도착한 그 꽃바구니 안엔 핑크빛의, 앙증맞은 편지 한 통이 꽂혀 있었다. 그 즉시 보는 것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분장실에서 들고 와 무대 옆으로 바짝 놓아두었다. 꽃바구니에게 첫 공연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황영빈님과 김혜숙님의 이름으로 배달된 꽃바구니였다. 가슴 한켠이 아릿해 왔다. 잊지 않으리.
공연을 끝내고 나는 지금까지 죽을 듯이 술을 마셨다. 포장마차 툇마루 역시 이틀 동안 죽었다 살아났다. 이틀 동안 마신 술은, 찾아온 사람들의 다양함에 깨춤을 추듯 종류도 다양했다. 지금 나는 고민 중이다. 공연도중, 동의보감에 출연제의를 받았지만, 과거에 한 번 했던 작품이고 잠시 잠시 나오는 역이라 썩 내키지 않는 터에 휴식은 고사하고 미리 예정된 개인적인 일들이 태산 같아서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이 그 길이니 그 길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관람해 주신 분들, 공연 내내 보내온 수많은 문자메시지, 뒷풀이에 동참햇던 지인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김상훈의 낡은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09. 01. 10. 연극배우 김상훈선생과... (0) | 2009.01.12 |
---|---|
[스크랩] 풍금소리 울리는 주막에서...... (0) | 2009.01.12 |
연극 [느낌, 극락같은] 포스터 (0) | 2008.10.03 |
가을 새와 작별하듯 (0) | 2008.09.13 |
잠시 들렀다 갑니다 (0) | 2008.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