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서랍

조폭계보역사

시인 김상훈 2010. 4. 6. 16:25

 

정치조폭, 그들은 누구인가
마피아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財테크 위해 정치권과 결탁

박용순 세계일보 사회부기자(yspark@sgt.co.kr)

실세 정치인과 조폭의 ?전략적 제휴?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할까. 합법 사업을 가장한 조폭이 이권을 지키기 위해 정치인을 활용하고 있다면…. 3대 패밀리가 부활하고, 그들의 직계?방계 조직이 정선카지노를 ?황금분할?했다는 충격적인 소문. 그 추악한 이면들을 들여다 본다.


서진룸살롱 사건과 장진석파

1980년대 조폭사에서 3대 패밀리 외에 서진룸살롱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1981년 7월 김태촌의 수하들은 오모씨를 중심으로 목포 조폭들을 규합해 범서방파 방계 조직인 ?맘보파?를 결성하고 서울 서초동 유흥업소를 무대로 활동한다. 하지만 맘보파는 1986년 장진석파 조직원들에게 서진 룸살롱에서 조직원 4명이 살해당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장진석파는 지략이 뛰어난 고문 정모씨에 의해 급조됐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장진석이 자신을 두목으로 하고 행동대원을 끌여들였다기보다 이른바 ?프로모터?인 정씨의 필요에 의해 태어난 조직이라는 것이다. 잠시 조폭의 조직 구성과 역할을 살펴보자

조폭 조직의 특성은 ?독재적, 가부장적, 의형제 체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조직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철두철미한 절대명령과 절대복종의 관계다. ?오야붕?은 절대적 존재이고, ?꼬붕?에게는 절대적 순종이 있을 뿐이다. 상사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혈연관계 이상의 친밀도를 강조하는 의형제 집단이다.

조직은 위로부터 두목-부두목-행동대장-행동대원으로 구성된다. 두목은 직접 또는 중간간부를 통해 조직원을 통솔한다. 두목은 통상 1인이나 부산 신20세기파처럼 드물게는 2인 이상이 조직을 공동관리하는 경우도 있다. 부두목은 두목의 지시를 받고 부하를 통솔한다.

부두목이 방계 조직의 두목으로 또 다른 하위조직을 이끄는 경우도 적지 않다. 행동대장은 일선에서 소위 ?똘마니?들을 거느리는 자들로, 조직원을 동원하는 임무를 맡는다. 행동대원 또는 똘마니들은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한다. 이와 함께 조폭에는 고문(자금책)?참모 등 이른바 비선 조직이 있다. 고문은 대체로 조폭 출신으로서 외형상 은퇴해 사업쪽에 진출, 조직의 후광을 업고 자신의 사업에 조직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이용호게이트에서 등장한 국제PJ파 여운환씨가 여기에 속하는 인물이다. 폭력조직과 무관한 인사가 사업상 불가피하게 고문으로 앉을 수도 있다.

드물게 참모를 둔 조직도 있는데, 이들은 내부에서 부두목 대접을 받는다. 이들은 직접 휘하에 행동대원을 거느리지 않고 조직 차원의 범행에도 직접 가담하지 않는다. 사전 모의 과정이나 수습 과정에만 가담한다. 명령계통에 들어가지 않고 대체로 지모가 출중한 자를 조직원 보호 차원에서 두목 직속에 둔다. 장진석파를 구성한 프로모터 정씨는 고문이자 참모의 성격을 띤다.

끝으로 조폭에는 추종세력이 있다. 이들은 행동대원들을 형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는 조폭 지원자들이다. 흔히 예비군이라고 부른다. 고교 불량서클이나 ?동네깡패?들이 여기에 속한다.

어쨌든 장진석파를 꾸린 정씨는 당시 3대 패밀리 두목들이 사라진 뒤 일국이파?강대우파?이민석파 등 목포출신 군소 폭력조직들이 득세하는 것을 간파하고 맘보파 조직원이자 유도대학 재학생인 장진석을 ?포섭?한다.

마피아형 조직으로의 업그레이드

목표는 전국 제패. 1985년 3월 장진석파 출범과 함께 70년대 살육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장진석파는 그해 5월 목포 일국이파 조직원 정모씨를 이태원 해밀턴호텔 앞에서 생선회칼로 습격하고, 6월에는 강대우파 두목 강대우씨의 운전사를 그로 오인하고 동대문 광장여관에서 칼로 난자한다. 이어 7월에는 이민석파의 두목 이민석을 강남 영동대로상에서 습격해 아킬레스건을 끊어 불구로 만든다.

거침없이 악명을 떨치던 장진석파는 1986년 8월14일 오후 10시20분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서진룸살롱에서 새로운 폭력조직을 만들려던 목포 출신 천종갑 등 부하 3명을 시비 끝에 살해하고 서울 관악구 사당동 정정형외과 2층 수술실에 버리고 달아난다. 장진석파는 이 사건으로 조직원 2명이 사형당하고 대부분 구속되면서 사실상 해체된다. 두목 장씨는 무기징역을 받고 수감중이다. 이상이 1970~80년대를 장식했던 조폭사다.

서진룸살롱 사건 이후 조폭은 지하로 숨어든다. 불법행위만으로는 조직의 생명을 이어가기 어렵게 되자 축적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합법적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등 변모를 꾀하고 있다. 그 일단이 지난해 서울지검 강력부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지난해 12월 대검 강력부는 칠성파 두목 이강환(58)씨 등 두목급 조직폭력배 19명을 구속했다. 이씨는 한?중 합자회사인 모 원석가공업체 부회장으로 취임한 뒤 일본 야쿠자 두목 K씨와 의형제를 맺는 등 조직 교류를 시도하고, 조직 재건에 필요한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지역 대형 유흥업소를 장악하며 폭력을 휘두른 사실이 드러났다.

또 신20세기파 두목 안용섭(51)씨는 부산에서 사행성 오락실 다섯곳을 운영하면서 하루 평균 1,000여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광주 국제PJ파 부두목 최광헌(43)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대형 유흥주점에서 허위 매출전표를 작성하는 수법으로 매출액 14억원을 누락시켜 3억2,000여만원의 세금을 포탈한 사실이 밝혀졌다. 검찰은 화들짝 놀랐다. 조폭이 ?합법 기업형? 즉 ?마피아형?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미 이때부터 조폭과의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검찰은 조폭이 성인오락실?유흥업소?소규모 건설업 ?사채업 등을 직접 운영하면서 조직기반을 확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예의주시했다. 특히 코스닥 열풍이 휘몰아치면서 벤처업계에도 조폭의 손길이 뻗치는 기미도 포착했다. 검찰 관계자는 ?요즘은 조폭들이 ○○사 대표, ○○컨설팅 부회장, ○○위원장 등의 직책을 내세우며 합법을 가장하고 있어 단속이 어렵다?며 ?주먹질만 하던 조폭을 이제 경제사범 다루듯 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에도 충남 보령의 조폭 ?태양회? 간부들이 나이트클럽, 건설회사, 광산 등을 운영하면서 공연장 임대, 도박장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다 검거됐다. 간부들은 하부 조직원들과 별도로 합법적인 사업가를 가장하며 지역 유지 행세를 해 왔다. 또 칠성파의 자금책인 정승욱(37)씨도 서울 역삼동에 ?S벤처엔젤?이라는 다단계 금융회사를 차려놓고 476명으로부터 73억여원을 가로챘다가 붙잡혔다. 검찰은 이 두 사건을 전형적인 마피아형 조폭사건이라고 분류했다.

검찰을 더욱 당혹스럽게 한 것은 3대 패밀리의 부활 조짐이다. 지난해 12월 범서방파 부두목 이택현(47)씨와 양은이파 부두목 오상묵(49)씨, OB파 부두목 김인호(42)씨 등 3대 패밀리 부두목급 조폭이 검찰에 구속됐다. 문제는 그들의 혐의. 이씨는 김태촌씨를 대신해 조직을 이끌면서 지난 1997년 12월 1억2,000여만원을 빌린 피해자를 협박해 2억5,000만원의 지불각서를 받아내는 등 고리의 사채업을 해온 사실이 발각됐다.

오씨는 조양은씨가 출소후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자 두목 행세를 하면서 불법 성인오락실을 강제로 빼앗고 나이트클럽 지분을 얻기 위해 폭행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OB파 김씨는 J제약사 등 부도회사를 상대로 채권을 받아내기 위해 폭력을 쓰다 수갑을 찼다.

검찰은 3대 패밀리가 ?조폭 제3세대?의 완성단계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긴장했다. 제3세대 폭력조직은 마피아나 야쿠자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네트워크화된 거대 조직. 수사당국은 다급해졌다. ?조폭이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르라?는 지상명령이 내려졌다.


■ 권력자 하수인 벗어나 대등한 관계로 비즈니스
■ 호남권 조폭 전국 평정, 여권 실세 연루설 증폭
■ 코스닥 열풍 타고 벤처업계에도 진출, 거액 챙겨
■ 3대 패밀리 부활 조짐, 정선카지노에서 고리 도박자금 사채업
■ 정치권 실세 활용, 검찰 인사에도 관여 의혹

1961년 ?자유당 정치깡패? 소탕전을 시작으로 거의 10년마다 되풀이된 ?조직폭력배(조폭)와의 전쟁?은 세기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것인가. 최근 ?이용호게이트?를 계기로 검찰이 정치조폭 뿌리 뽑기에 나서고 경찰이 조폭 소탕전을 선언함에 따라 이런 ?징크스?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지난 1960년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알린 ?4?18 고대생 피습사건?으로 이듬해 혁명재판에서 이정재?임화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지광?이화룡 등 나머지 1세대 주먹들도 모두 ?숙청?됐음은 물론이다. 11년이 지난 1972년 10월유신과 함께 박정희 정권이 사회악 처단 조치를 내리면서 조폭은 또 한차례 철퇴를 맞았다.

조폭들은 1970년대 ?해방공간?에서 무주공산이었던 서울의 주인이 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 김태촌?조양은?이동재의 ?칼싸움?은 조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어 1980년 신군부는 ?사회악 일제 특별조치?를 내리고 조폭 5만7,561명을 검거, 이들 중 3만8,259명을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이후 서울의 밤은 한동안 조용했다. 하지만 새로 조성된 강남 상권을 차지하기 위해 꿈틀대기 시작한 조폭은 1987년 6?29선언 전후 어수선해진 사회 분위기를 틈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서진룸살롱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용팔이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이승완의 호국청년연합회를 비롯해 김태촌의 신우회, 칠성파 이강환의 화랑신우회, 전국 보스들의 연합체인 일송회 등 전국 규모의 조폭단체가 잇따라 출범했다. 급기야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조폭 7,112명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조폭들로서는 삼청교육대 악몽을 겪은 지 10년만이었다.

1990년대 조폭들은 잠행했다. 이렇다할 사건을 만들지 않아 마치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 듯했다. 다만 1993년 정덕진의 슬롯머신 사건을 통해 한결 ?업그레이드?된 면모를 비쳤다. 쉽게 말해 노는 물이 달라진 것이었다. 4차례나 주기적으로 정권의 칼을 맞은 조폭들에게 ?권력자들과의 공생?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2001년. 11년만에 검찰과 경찰은 다시 칼을 빼들고 조폭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하지만 칼을 겨눌 만한 상대가 선뜻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이번 조폭과의 싸움이 예전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할 수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G&G그룹 이용호 회장의 해결사로 지목되면서 수면위로 떠오른 국제PJ파 고문 여운환씨의 암약에서 보듯, 조폭들은 그동안 축적한 막대한 자금을 토대로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여전히 ?고유영역?을 지키고 있다.

유흥업소를 갈취하며 하이에나처럼 푼돈을 받아먹기보다 합법적인 업체를 운영하며 정?관계 유력인사들과 친분도 맺는다. 권력자들의 하수인에서 벗어나 대등한 관계에서 이들과 비즈니스를 하게 된 것이다. 조폭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보험을 든다는 심정으로 권력자의 뒤를 봐주며 그들의 그림자에 숨어 있다.

검찰이 이번에 ?정치조폭 근절?이라며 단속 대상의 성격을 규정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해 ?정현준게이트?에서는 조양은의 자금이 사설펀드에 유입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어 동방금고와 관련해서는 신양팩토링 대표 오기준씨가 조폭 출신으로 정계에 로비를 벌였다는 말도 나왔다. 이번 이용호게이트에서는 여씨가 등장했고, 여씨보다 거물 주먹이라는 J씨가 여권 핵심인 두명의 K씨와 결탁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조폭과의 전쟁? 선포의 숨은 동기

현 정권 들어 대형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조폭이 등장하고 이를 고리로 여권 인사 연루설이 제기됐다. 호남권 조폭이 전국을 제패한 상황에서 지역연고가 같은 현 정권으로서는 사사건건 입도마에 오르는 상황이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조폭과의 전면전 선포?는 이용호게이트로 궁지에 몰린 정권이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조폭 수사에 정통한 수사관 A씨는 ?조폭 수사를 천명할 때는 이미 사건이 될 만한 ?꺼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면서 ?검찰이 정치조폭이라고 지목한 것으로 미뤄 정치권과 조폭간 공생관계가 일부 까발려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조폭과의 전쟁 선언은 조폭들에게 도망가라고 알려주는 처사와 다름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검찰의 분위기는 요즘 심상치 않았다. 오래 전부터 정치조폭에 대한 내사를 벌여 상당부분 수사자료를 축적하고 있다는 말이 검찰 안팎에서 새나오고 있다.

우선 정선카지노 단속설이 주목을 끈다. 국내 유일의 내국인용 카지노인 이곳의 풍경은 TV 드라마 ?모래시계?를 연상케 한다. 정덕진-김태촌이 활개친 슬롯머신사건의 배경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수사당국은 정선카지노를 조폭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말한다. 랭킹에 드는 조폭들은 모두 이곳으로 몰려와 고리로 도박자금을 대는 ?꽁지?노릇을 하고 있다.

이권을 황금분할하기 때문에 조직간 알력이 생기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이곳에 현 정권 실세인 모씨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돈다는 것이다. 범서방파?양은이파?OB동재파 등 이른바 3대 패밀리의 직계?방계 조직이 정선카지노를 분할했고, 고위층 인사가 그들을 비호하면서 정치자금을 조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지검 강력부가 몇달전 처리한 서울 동대문시장 모 종합상가 분양사건도 재수사가 진행중이라는 풍문이 파다하다. 당시 이 사건은 D파의 단순한 상인 갈취사건으로 마무리됐지만 정계 고위인사 연루설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특히 종합상가 건물의 회장이 경찰 치안자문위원을 지내는 등 활동이 왕성했던 인물로 전해지면서 검찰의 ?정치조폭? 수사망에 다시 포착됐다는 전언이다.

이와 함께 최근 구설수로 물러난 관계 고위인사의 친지 B씨가 강남의 주류공급권을 독점하다시피 한 사건의 주변에도 조폭이 개입한 정황이 잡히고 있다고 한다. 유흥업소나 대형음식점에 각종 재료를 공급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조폭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린 B씨와 조폭의 결탁은 수학공식과도 같다는 지적이다. 최근 정현준-이용호게이트에서 꼬리가 잡혔듯 사설펀드 가입이나 전환사채 구입 등을 통해 조폭자금을 ?뻥튀기?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조폭들의 재테크 수법은 ?백발백중?이다. 사전에 손실을 보상받기로 약속받기 때문에 손해보는 법이 없다.

정계 일각에서는 조폭을 통한 재테크가 가장 안전하다는 말이 나돈다. 조폭들의 재테크에 정치권 비자금이 유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최근에는 기업 합병에 관여하거나 유망한 벤처기업에 자금을 대주었다가 사장을 협박해 아예 회사를 빼앗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선거철이면 조폭은 후보 경호원으로 등장한다. 조폭이 아무개 후보에게 붙었다는 소문이 나돌면 어떤 조직도 그 후보에게 접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후보에게 이름난 조폭의 경호처럼 안전한 장치는 없다. 이런 과정에서 조폭은 정치인과 친분을 맺기도 한다. 향후 공생관계의 출발점인 셈이다. 따라서 선거철이면 각 조직의 보스들이 만나 경호를 맡게 될 후보를 공개하고 서로 치지 않는다는 신사조약을 맺는다고 한다.

조계사 사태처럼 종교계 내부의 갈등에 따른 무력사태때도 조폭들은 용역업체 직원들을 가장해 투입된다. 부동산이 활황일 때는 ?떳다방?의 뒤를 봐주며 한몫을 챙긴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됐다.

이밖에 성인오락실 이권개입, 건설현장 무력동원, 경매 과정 참여 등 고전적인 수법도 여전하다. 그들은 이제껏 밥줄을 늘리면 늘렸지 결코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 조직이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궁금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970년대말 형성돼 80년대 중반 확립된 범서방파?양은이파?OB동재파의 구도가 여전히 유효하다.

두목들의 구속이나 은퇴로 한때 사라질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방계 조직이 생기면서 족보는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서진룸살롱사건을 일으킨 ?진석이파?가 이 구도에 도전장을 냈지만 좌절했다. 조폭사에서 파란만장한 장면이 가장 많았던 1970~80년대 3대 패밀리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자.

삼우회 타격 입고 명동파 부상

조폭의 태동기는 1920년대 야쿠자를 불러들여 명동-종로 상권을 장악하려던 일본 상인들에 맞서 조선 주먹들이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한 때로 보는 시각이 많다. 1930년쯤부터 서울 왕십리?서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구마적?과, 종로?관철동을 중심으로 한 ?신마적?이 등장해 야쿠자와 자주 주먹대결을 벌였다.

1940년대 들어서는 명동?종로를 무대로 한 ?우미관 패?(두목 김두한)와 일본 야쿠자 조직 하야시(한국명 선우영빈)의 ?하야시패? 등이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다. 1945년 정부 수립 후에는 청계천을 중으로 한 ?동대문사단?(이정재?유지광?임화수), 명동파(이화룡?신상현), 종로파(김두한?종로꼬마 이상옥) 등이 이른바 3대 패밀리를 형성하며 서울을 장악했다.

당시 해방공간에서 냉전 사고가 팽배한 상황에서 주먹들은 정치색에 물들어 갔다. 1955년 5월 자유당 집권을 보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유지광이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최초로 ?성문화?한 폭력조직 ?삼우회?를 결성했다. 이 시기 북한 출신 이화룡이 결성한 명동파가 삼우회와 치열한 이권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1961년 군부가 조폭 소탕작전을 벌여 주로 삼우회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사이 명동파가 부상했다. 1960년대 중반 경기가 호전되자 이화룡의 부하인 육군 상사 출신 신상현이 ?신상사파?를 결성해 서울의 주인으로 나섰다. 조폭 현대사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신상사파가 서울을 장악할 때쯤 지방에서는 차세대 주먹 김태촌과 조양은이 성장하고 있었다.

신상사파는 1965년 14명으로 결성됐지만 1년도 안돼 조직원이 100여명으로 불어났다. 때마침 정부의 공업화 정책은 농촌 젊은이들을 서울로 유인했다. ?가난한? 호남지역 젊은이들의 행렬 중에는 광주?전주?목포?여수?순천 등에서 활약한 주먹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종로 무교동 일대에 자리잡으면서 오종철?박종석(일명 번개) 등을 중심으로 ?범호남파?로 불리는 폭력집단을 결성했다.

박씨는 당시 소공동의 한 유흥업소 영업부장으로 있으면서 ?번개파?를 결성, 호남파의 서울 전초기지가 됐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신상사파에 대응할 정도의 세력은 못됐다. 범호남파는 호시탐탐 명동 진출을 노리며 1970년초 중구 명동 백남호텔 나이트 영업부장 자리를 두고 신상사파에 도전하지만 쓴맛만 보았다.

그러나 해가 바뀐 1971년 1월1일 조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이 발생한다. 신상사파의 소굴이었던 명동 사보이호텔 커피숍을 생선회칼과 쇠파이프?야구방망이로 무장한 4명의 범호남파 특공대가 습격해 신상사파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다. 이 사건으로 신상사파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범호남파가 명동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마련된다.

하지만 범호남파의 앞날에는 호남 주먹들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몸집이 불기 시작한 범호남파 내부에서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1972년 10월17일 유신 선포에 따라 두목급 9명이 구속되면서 무교동을 중심으로 한 호남 출신 잔재세력들은 새로운 계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범호남파의 새 두목으로 등장한 것이 오종철이다. 오씨의 직계부하로 조양은이 자리잡는다.

반면 박종철은 김태촌을 데리고 ?번개파?를 결성해 독립해 나간다. 양측의 극렬한 대립은 서로를 생선회칼로 무장시켰다. 이때부터 주먹이라는 별칭은 사라지고 조직폭력배라는 오명이 붙게 된다. 1976년 3월 서울 태평로1가 국제호텔 옆 골목에서 생선회칼로 무장한 번개파 조직원들이 오종철을 습격,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허벅지를 난자해 불구로 만든다.

김태촌의 부상과 몰락

오씨는 이 사건으로 조폭세계를 떠나고 호남파는 침체기에 빠진다. 반면 기세등등해진 번개파는 1977년 김태촌이 실세로 부상하면서 전남 광산군 서방면 그의 출신지를 딴 ?서방파?를 결성하고 번개파라는 이름을 벗어던진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김태촌은 그해 10월 이른바 ?76년 신민당 각목사건?을 지휘한 사실이 발각돼 구속된다.

이때 김은 조폭세계를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태촌은 1986년 1월 출소하지만 그해 9월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을 습격한 혐의로 다시 수감된다. 김태촌은 1989년 1월 복역중 폐암 선고를 받고 좌측 폐를 절단하였다는 이유로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하지만 그는 1990년 2월 부동산 투자에서 손해본 돈을 되찾기 위해 폭력을 사주한 혐의로 구속돼 징역 10년형을 받는다. 그는 2003년 4월3일 형 집행이 만료된다. 하지만 보호관찰 처분이 있어 그가 언제 자유의 몸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김씨가 사라진 서울은 조양은의 독무대가 됐다.

조씨는 광주 숭의고 3년 중퇴후 ?광주 동아파? 조직원으로 활동한다. 광주 충장로 관할권을 두고 ?OB파?와 싸우다 패하고 두목 전모씨가 외항선원이 되어 조직을 떠나자 그는 1970년 3월 부두목인 박영장과 함께 상경해 오종철 밑으로 들어갔다.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으로 범호남파의 기대주로 떠오른 조양은은 오씨가 김태촌측에 당해 불구가 되자 보복을 선언한다. 이후 조양은은 1976년 4월 중구 태평로 아시아호텔에서 서방파 조직원들을 습격, 수차례 전면전을 진두지휘하면서 범호남파의 두목으로 자리잡는다. 김태촌이 구속된 뒤 ?지존?에 등극한 그는 이듬해인 1978년 11월10일 자신의 부친 제삿날 ?양은이파?를 출범시킨다. 하지만 조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1980년 2월 방계 조직인 순천시민파 두목으로부터 ?부두목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똘마니?들을 데리고 순천으로 내려가 부두목을 급습한다.

조는 결국 이 사건으로 수감돼 15년형을 받는다. 이후 조씨는 1995년 3월15일 대구교도소에서 만기출소하지만 서울리조트 회원권 갈취 및 1995년 12월 군산 리버사이드 관광호텔 증기탕 임대계약을 둘러싼 편취 혐의로 96년 2월 재구속된다. 김태촌과 조양은이 사라진 조폭세계를 비집고 등장한 신예가 ?OB동재파?의 두목 이동재다. 이쯤에서 광주지역 조폭사를 간단히 살펴야 이해가 쉽겠다. 자유당 시절 광주 시내 대호다방과 동아다방을 무대로 각각 ?대호파?와 ?동아파?가 결성됐다.

1960년대 들어 양 계파간 주도권 싸움에서 동아파가 패하자 동아파의 부두목 박영장은 부하인 조양은을 데리고 상경한다. 대호파는 이후 ?OB파?로 이름을 바꾼 뒤 다시 ?구OB파?와 ?신OB파?로 분파됐다. 당시 신OB파 부두목이던 이동재는 1978년 직계 행동대장 안득순에게 두목 박남현을 살해하도록 지시했으나 실패하자 상경해 서울에서 ?OB동재파?를 결성한다.

이때 김태촌은 이미 구속된 상태. 이씨의 상대는 양은이파였다. 그러던 중 1987년 11월 전쟁을 치를 만한 일이 생긴다. 양은이파 행동대원 정모씨가 OB동재파 조직원 김모씨를 밀고해 구속시킨 것. 격분한 OB동재파는 보복을 선언했다.

1987년 11월28일 새벽 3시 40분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온천안마시술소 앞길에서 OB동재파 조직원 6명이 양은이파 간부 2명을 생선회칼로 난자해 중상을 입힌다. 이에 대한 양은이파의 앙갚음은 결국 이동재를 조폭세계에서 은퇴시키게 된다. 양은이파는 이듬해인 1988년 9월14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성동구 행당동 전주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이동재의 다리를 난자해 불구로 만든다. 이동재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고, 조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부두목 김모씨는 강남 유흥가에 남고, 행동대장 원모씨 등 조직원들은 광주로 낙향해 무등산파를 결성한다.

정치조폭, 그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더 큰다?는 것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조폭이 권력층과 결탁하는 단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 단계에 진입하면 조폭을 섣불리 건드릴 수 없게 된다. 조폭을 건드리는 순간 정치사건으로 비화되기 때문이다. 조폭이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나를 공격한다면 정치권 거물인사도 함께 폭사한다?고 대들기라도 한다면 수사당국으로서는 곤욕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검찰이 이번에 예전과 달리 정치조폭을 중점단속하겠다고 수사 대상의 성격을 한정한 것은 조폭의 업그레이드가 상당수준 진척됐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정치조폭이란 무엇인가? 어떤 모습을 한 조직들인가? 조폭사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몇개 있다. 우선 지난 1993년 5월3일 정덕진씨의 검거로 시작된 슬롯머신사건. 이 사건으로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의원, 검찰의 실세 이건개 대전고검장, 안기부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엄삼탁 병무청장, 천기호 치안감 등 6공의 실력자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당시 이 사건은 ?돈키호테?라는 별명을 가진 서울지검 강력부 홍준표 검사가 아니었으면 상부의 외압 때문에 중도에 좌절됐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는 정씨 소환과 함께 이를 언론에 공표하고 공개수사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권력형 비리사건을 비공개로 수사하다 오히려 수사한 검사가 한직으로 쫓겨나는 사례를 보아왔던 홍검사로서는 자신도 살고 진상도 밝히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 사건은 조폭사에서 조폭과 권력층의 공생관계를 낱낱이 밝힌 드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이에 앞서 김두한?이정재?유지광?임화수 등 1세대 주먹들이 정치권의 지시를 받고 자주 동원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주먹들의 정치개입은 수법이 더욱 교묘해진다. 이 시기 대표적인 ?정치조폭?은 이승완을 꼽을 수 있다. 1987년 이승완의 호국청년연합회가 주도한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용팔이사건)?이 잘 말해준다. 용팔이사건은 통일민주당 창당을 원하지 않는 측에서 김용남(일명 용팔이) 등 폭력배를 동원하여 전국 18개 지구당의 창당대회장에 난입해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다.

배후에는 이승완, 전 국회의원 이택희?이택돈씨 등이 관련된 것으로 밝혀져 각각 구속되거나 수배됐다. 이승완씨는 태권도 9단의 무도인 출신으로 익산 원광대 법학과 2년을 중퇴했다. 그는 중?고태권도연맹회장, 전국고단자회 회장, 전국지도관총관장 등을 지내면서 1970년대 중반 정계의 L씨와 친분을 맺으며 중앙무대로 진출한다.

조폭들이 조직을 위장하기 위해 애쓴 것과 달리 그는 ?좌경척결? ?자유민주주의 수호? 등 정치적 색채가 짙은 구호를 내걸고 준정치단체인양 호국청년연합회를 창립해 공개적인 활동을 벌여왔다. 발기인에 교수?실업인?체육인?사회사업가?재미교포?학생대표 등 80여명이 서명했다. 호청연은 한강 둔치에서 청소년 선도활동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를 위한 홍보전단을 뿌리기도 했으며 1989년 4월에는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과 관련해 규탄성명을 발표하는 등 노골적인 정치활동을 벌였다.

그러다 이승완씨가 용팔이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받자 호청련은 1990년 2월21일 자진해체됐다. 하지만 그는 수배중에도 공식석상에 여러 차례 버젓이 나타났다. 이밖에 그가 수배받은 지 1년5개월이 지나서야 검거전담반이 구성되는 등 정권 실세가 뒤를 봐주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동아파 두목 박영장과 김태촌

지난 1986년 6월 한강 고수부지에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이 호남 출신 조폭들을 끌어모아 축구대회를 개최했을 때 정치인들이 봉투를 보내고 당시 전경환 새마을운동중앙본부장 등 정계 실세들이 행사장을 찾아 축하한 사례 역시 정치조폭을 논할 때 단골로 등장한다. 사실 이때 정계 인사들을 끌어모을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은 김태촌이라기보다 그의 선배인 박영장씨였다.

그는 범서방파의 뿌리인 동아파 두목으로서 장인인 신모씨가 정치권 인사였다. 박씨는 1976년 신민당 각목 전당대회에 개입한 대가로 야당의 거물 정치인은 물론 각종 정보?수사기관 관계자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지난 1983년 여수 앞바다 양식장 이권분쟁에 개입한 OB동재파 조직원들을 수사한 K검사가 2년뒤 검찰을 떠나게 된 것은 박씨의 입김 때문이라는 설이 무성하다.

박씨가 K검사에게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넣었으나 통하지 않자 정치권 실력자들을 동원해 검찰로 하여금 K검사를 자체 감찰케 해 결국 사표를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난 1978년 부하들을 시켜 도박판을 턴 OB동재파 두목 이동재씨가 성북경찰서 형사대에 검거됐다 곧 풀려난 과정에도 박씨의 힘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검찰 간부 모씨가 ?이씨는 검거된 폭력배들과 관계없는 다른 방 손님?이라며 풀어주라고 압력을 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폭을 단속해야 할 검찰이 조폭의 든든한 배경이 된 사례는 적지 않다.

김태촌의 인천 뉴송도호텔사건도 마찬가지다. 1986년 7월 범서방파 두목 김씨는 부하들을 시켜 인천 뉴송도호텔을 습격, 사장 황모씨를 난자했다.

수사 과정에서 당시 서울고검 박모 검사가 자신의 채권 해결을 위해 지방근무때 알게 된 김씨를 동원해 청부폭력을 한 사실이 드러나 박검사는 옷을 벗었다. 김태촌의 운전기사 구모씨가 작성해 파문이 인 이른바 ?김태촌 비망록?에는 1989년 6월에서 8월까지 김씨의 비행은 물론 경찰 간부?교도관?안기부 직원 등과의 교분관계 등 비호세력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당시 서울시경의 최모 총경이 경찰의 폭력배 단속 계획을 김씨에게 알려주어 피신시킨 사실도 이 기록에 남아 있다.

대전의 조직폭력배인 ?진술파?의 김진술씨가 재판 과정에서 1991년 1월 당시 대전지검 김모 부장검사, 김모검사, 강모 수원지법판사, 김모 전 국회의원, 보안사 간부 등 유력인사들이 폭력배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벌인 사실을 공개해 충격을 준 일도 있다. 나중에 폭력배들이 검사와 판사가 보는 앞에서 집단 칼부림을 벌인 사실이 추가로 확인돼 결국 김부장검사와 강판사가 사표를 냈다.

또 1986년 8월 ?진석이파?가 경쟁관계의 조직폭력배들이 술을 마시던 술집을 습격해 4명을 난자 살해한 ?서진룸살롱사건?에서도 목포 출신인 진석이파의 고문 정모씨가 정계 고위층과 친분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파문이 일기도 했다. 또 목포파 두목 강대우가 구속되는 과정에 당시 국회의원 모씨가 검찰을 상대로 노골적인 로비전을 펼쳤고, 수감되자 서울구치소에 특별면회를 가 구치소 간부들에게 잘 대해 주라고 호통친 것은 정치조폭을 말할 때 자주 회자된다. 끝으로 김태촌씨가 1989년 폐암을 이유로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풀려날 때도 당시 현역 의원들의 힘이 작용했다는 의혹도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요즘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용호게이트에서 등장한 국제PJ파 여운환씨나 정현준게이트의 서방파 오기준씨는 평소 정치권 실세들과 친분을 쌓은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고 한다. 과거 조폭 두목들 중에는 수백억원의 재산가도 즐비하다는 말도 나돈다. 어쩌면 정치조폭의 실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돈을 많이 쌓아두어 이제는 갈취 등 돈을 끌어모으기보다 있는 돈을 관리하려고 정치권 실세들과 친분을 맺는 조폭들?이라고 말이다.

호남에 연고를 둔 현정권 들어 유난히 조직폭력배의 권력유착설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재벌조폭?중 호남 출신 주먹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도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현정권이 DJ와 조폭의 합성어인 ?뉴 DJP?라는 비아냥거림도 흘러나온다. 현 정권으로서는 더 이상 ?정치조폭?을 좌시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있다. 한 경찰관은 ?한번 깡패는 영원한 깡패다?라는 말로 조폭 근절의 어려움을 표현했다. 수사당국이 이번에는 ?조폭 단속 10년 주기의 징크스?를 깰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를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월간중앙 2001.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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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과 권력

주먹과 권력의 관계는 흔히 말하듯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다. 주먹은 권력의 보호가 필요하고 권력은 주먹을 이용한다. ?왕년의 주먹? B씨는 ?오늘날 주먹계에서 힘이라는 것은 곧 권력 실세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말한다.

전국 주요도시 주먹실세 계보
주먹, 검사, 정치인 커넥션
호남주먹의 뿌리와 가지
전화 한 통으로 권력 움직이는 ?귀족주먹?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8월10일 ?아시아 아마추어복싱연맹? 부회장 김옥O씨(48)가 죽은 사건은 주먹계에서 큰 화제였다. 김씨는 지난 4월 대전지검의 성인오락실 슬롯머신수사와 관련해 공갈 등의 혐의로 지명수배된 이후 경기도 의정부의 한 암자에 숨어 지내왔다. 사인은 심장마비. 경찰에 따르면 이날 새벽 1시쯤 산에 오르다 갑자기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목포 출신인 그는 대전 주먹계의 거물이었다. 그의 죽음이 주먹계에 충격을 준 이유는 그가 여권 실세 K의원과 친분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주먹과 권력 관계의 허망함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라 할 만하다. 주먹계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현 정권에서 호남주먹이 득세한다고 말하지만 부와 권력을 움켜쥔 호남주먹은 소수에 불과하다?며 ?수십년 동안 설움과 핍박을 받다 이제 기 좀 펴는 것을 가지고 너무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 목포 주먹의 허망한 죽음

주먹과 권력의 관계는 흔히 말하듯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다. 주먹은 권력의 보호가 필요하고 권력은 주먹을 이용한다. ?왕년의 주먹? B씨는 ?오늘날 주먹계에서 힘이라는 것은 곧 권력 실세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말한다.

?주먹과 권력의 관계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주먹은 권력에 투자하고 권력은 주먹을 이용한다. 그 인맥이 여간 탄탄한 것이 아니다. 끊으려 해야 끊을 수가 없다.?

?이용호 게이트?가 ?호남 커넥션? 시비로 발전한 것은 야당 탓이 아니다. 야당이 정치공세 차원에서 사태를 키운 측면도 있지만, 근원은 주먹과 권력의 결합에 있다. 이 커넥션의 기본 원리는 공생이다. 한쪽이 정치자금을 제공하거나 선거에 도움을 주면, 한쪽은 특혜나 이권을 준다.

오늘날 기업형으로 바뀐 주먹은 더 많은 이권을 챙기기 위해 권력에 다가간다. 권력은 양지의 세계에서 처리하기 껄끄러운 일을 주먹에게 맡긴다. ?이용호 게이트?에서 주먹 출신 사업가인 여운환씨가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하고 ?정현준 게이트?에서 오기준이라는 과거 호남주먹의 대부가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주먹과 권력의 결합이 빚어낸 필연적 현상이다.

?이용호 게이트? 발생 이후 주먹세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 주먹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주먹계 실세는 누구고 주먹계 배후세력은 누구인가. 현재 경찰에서 파악하는 전국 조직폭력배는 총 199개파에 4153명이다. 검찰은 전국 28개 지청을 통해 주요 조직폭력배 162개파 668명을 관리하고 있다(2000년 대검 강력부 자료).

하지만 이는 수사기관이 편의상 분류해놓은 자료일 뿐 실제 사정은 많이 다르다. 이른바 ?실세?들은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 데다 대부분 사업가이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여운환씨가 경찰 관리대상에서 빠져 있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주먹계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경찰?검찰이 파악하고 있는 주먹들은 맨날 빵(감방)에 드나드는 ?가지?일 뿐?이라고 말했다.

주먹세계의 실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호남주먹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현 정부 들어 호남주먹이 드세졌다는, 이른바 호남주먹 득세설은 한편으로는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맞지 않는다. 일부 호남주먹이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권력층과의 친분을 과시한다는 점에서는 맞다. 하지만 호남주먹이 예나 지금이나 주먹계 강자라는 점에서는 맞지 않는 얘기다.

주먹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지역주먹과 전국구주먹이다. 지역주먹은 특정 지역에서만 힘을 쓴다. 반면 전국구주먹은 말 그대로 전국 어디서나 실력 또는 이름값을 인정받는 주먹이다. 주먹세계에서 호남주먹이 돋보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전국구주먹의 상당수가 호남주먹에서 배출된 점이다.

호남주먹이 위력을 떨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부와 권력이 집중된 서울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로 진출한 호남주먹은 1970년대 후반 이른바 3대 패밀리 시대를 거치며 서울에서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호남주먹이 서울로 몰려든 현상에 대해서는 ?못 먹고 못 살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는 호남주먹 중 일부는 부를 움켜쥐었다. 겉보기에는 다들 사업가다. 실제로 직접 주먹을 쓰는 일도 별로 없다. 정확히 표현하면 주먹이라기보다는 ?주먹 사업가?다. 하지만 여운환씨의 경우에서 보듯 이들이야말로 주먹계를 움직이는 실세거나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동아파와 3대 패밀리의 후예들

현재 서울 주먹계의 실세 그룹은 40대가 주축이다. 3대 패밀리(양은이파, 서방파, OB파) 시절 행동대장급으로 활약했던 이들은 현재 독자 계파를 꾸리거나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조직은 동아파. 동아파는 원래 광주에서 대호파와 더불어 1960년대 광주 주먹계를 양분했던 조직이다. 충장로파로도 불리는데 1969년 두목 전희O씨가 구속되면서 대호파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서울에서 ?최고 잘 나가는 주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문아무개씨. 광주 송정리 출신인 그는 1990년대 초 해외도박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적이 있다. 그후 건설업과 사채업에서 큰돈을 벌었는데 최근 벤처업계에도 진출했다. 재산이 300억원대로 알려져 있다.

검찰은 그를 동아파의 실질적인 두목으로 보는데, 그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한번에 200명 가량의 부하를 동원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사업에 전념하면서 주먹계를 떠나기 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는 정부 고위직을 지낸 민주당 P의원과 친분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북지역에 위치한 대형 상가의 고위간부인 김아무개씨는 동아파 실세로 통한다. 문씨 직계인 그는 19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당시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상가 분양 등으로 수백억원대의 재산가가 됐다.

역시 P의원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계보상? 동아파 두목인 또다른 문아무개씨(50대?건물입대업)는 얼마 전 검찰에 구속됐다.

주먹계에 따르면 3대 패밀리 조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두목들이 오랜 수감생활 또는 해외도피로 조직을 관리하지 못한데다 중간 간부들이 독자적인 길을 걷기 때문이다. 3대 패밀리의 위력이 통하는 곳은 교도소뿐이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교도소에서는 아직도 조양은이나 김태촌이라는 이름이 통한다고 한다.

서방파 두목 김태촌씨는 10여 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다. 출소예정일은 2004년 10월.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씨는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1988년 양은이파 계열인 순천시민파에 의해 불구가 되도록 난자 당한 OB파 두목 이동재씨는 미국 뉴욕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긴 해도 3대 패밀리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양은이파 조직원이었던 한아무개씨는 강남 모 호텔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수백억원대의 돈을 벌었다. 유명 여가수 U씨의 매니저를 맡기도 했다. 그밖에 서울에서 활동하는 3대 패밀리의 후예 중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강아무개, 조아무개, 나아무개, 박아무개씨 등이 있다. 이들 또한 모두 사업가로 변신했다.

양은이파 계열 조직원이었던 강씨는 1980년대 후반 라이벌 조직의 보스를 난자해 악명을 떨쳤다. 모 정당의 대표를 역임한 K씨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OB파 행동대장으로서 칼잡이로 이름을 날렸던 조아무개씨. 1980년대 후반 서방파 중간보스 이아무개씨를 기습하는 등 서방파와 OB파의 ?전쟁?에 앞장섰던 그도 지금은 보스 대접을 받고 있다.

서방파 막내였던 나씨는 강남에서 큰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서방파 조직원이었던 박씨는 고향이 목포인데, 지난해 정권 실세로 통하는 P씨가 결혼식 주례를 서 화제가 됐다. P씨는 과거 야당 시절 주먹들의 경조사를 잘 챙기기로 유명했다.

한편 검찰은 주먹계의 시각과는 달리 3대 패밀리 조직이 명맥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고 뿌리를 뽑을 태세다. 검찰은 올초 3대 패밀리의 부두목급 3명을 구속했다. 이택O(서방파), 오상O(양은이파), 김인O씨(OB파)가 그들이다. 이중 이씨는 집행유예로 출소, 인도네시아로 출국했다. 오씨는 양은이파 직계가 아니라 방계인 순천시민파 두목이었다. 김씨는 과거 명실상부한 OB파의 2인자로서 이동재씨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고위층과 통하는 호남주먹의 ?뿌리?

김태촌씨와 친구 사이로 서방파의 중간보스였던 이아무개씨. 일찍이 동남아로 진출해 카지노사업에 손을 댄 그는 1990년 해외도박사건에 연루돼 외환관리법위반으로 기소중지됐다. 정권이 교체된 직후 귀국, 현재 서울에서 대규모 위락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동아파 두목 문아무개씨의 동향 선배다.

호남주먹은 그 뿌리가 매우 깊고 단단하다. 표면적으로는 위에 언급한 40대 주먹들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선배주먹들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비결은 바로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과 오랜 세월에 걸쳐 다져온 인간관계다. 호남주먹은 크게 전남 주먹과 전북 주먹으로 구분되는데, 대대로 전남 주먹이 우위를 보였다. 전남 주먹의 양대 본산지는 목포와 광주다. 전통적으로 광주보다는 목포 쪽이 드세고 걸출한 주먹도 많이 배출됐다.

호남주먹이 서울로 진출한 시기는 1960년대 중반이다. 먼저 자리를 다진 쪽은 목포 주먹. 박종O, 오종O씨 등이 상경 1세대 주먹이다.

번개라는 별명으로 한 시절을 주름잡았던 박씨의 주 활동무대는 북창동 일대였다. 계보상 김태촌씨의 대선배로 1989년 김씨가 조직한 신우회의 고문(검찰 자료에는 회장)을 맡는 등 호남주먹계의 대부로 군림해왔다.

그는 1988년 국내 최대 폭력조직의 하나인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O씨, 수원 주먹계 대부 최창O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야쿠자 조직과 우의를 다지는 행사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모 스포츠협회의 고위직을 맡고 있다.

무교동에 자리잡았던 오씨는 조양은씨의 직계 선배다. 1976년 3월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김태촌씨 부하들의 칼에 맞아 불구가 된 이후 사실상 주먹계에서 은퇴했다. 조양은씨와 김태촌씨 간에 벌어진 ?3년 전쟁?의 계기가 바로 오씨 피습사건이다.

광주 출신 주먹의 대부는 박영O씨다. 서열상 박종O씨 바로 아래로 원래 광주 동아파 소속이다. 전 국회의원 신아무개씨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후배 김태촌씨를 도와 신우회 자문을 맡았다. 1990년 ?범죄와의 전쟁? 때 구속됐을 당시 언론은 그를 ?국내 최대 폭력조직 서방파의 전신인 동아파의 대부?라고 소개했다.

정치권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운 그는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사건?에 관련됐다. 당시 신민당 비주류측의 요청을 받아 김태촌씨를 비롯한 직계 ?동생?들을 이끌고 전당대회에 참석해 주류측에 폭력을 행사한 혐의다. 김태촌씨 석방운동을 펼치고 목포파 두목 강아무개씨의 배후 노릇을 했다는 소문도 있다. 주먹계에서는 박종O, 박영O 두 박씨의 영향력이 지금도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방파는 광주시 서방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따 만든 조직이다. 뒷날 김태촌씨가 범서방파로 발전시킨 이 조직의 최초 두목은 건설업자 김성O다. 김씨의 뒤를 이어 서방파를 이끈 사람이 바로 ?정현준 게이트?로 널리 알려진 오기준씨다. 목포 출신인 오씨는 김태촌씨의 직계 선배로 1977년 구속된 적이 있다.

당대 최고의 호남주먹들

신우회 회장(검찰 자료에는 부회장)을 맡을 정도로 김태촌씨와는 무척 가까운 사이. 김씨를 서울로 불러들인 사람도 오씨다. 김씨는 평소 그를 ?존경하는 선배?로 깍듯이 대접했다.

박종O, 박영O씨와 마찬가지로 오씨 또한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정치권에 발이 넓어 나름대로 주먹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현준 게이트?가 터진 직후 미국으로 도피한 후 귀국하지 않고 있는데, 이경자씨에게 고위층을 연결해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최근 LA에서 룸살롱을 개업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고위층 인척인 차아무개씨와 밀접한 관계다.

오씨와 같은 시기 광주에서 활동한 주먹으로 김제O씨가 있다. 구OB파 두목인 김씨는 한때 광주 주먹계를 통일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동생?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탓이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술집을 운영했다.

비슷한 시기에 상경한 광주 출신 주먹으로 정아무개, 추아무개씨 등이 있다. 정씨는 무도인(태권도) 출신이다. 광주에서 칼을 맞고 서울로 올라온 추씨는 서울역 부근 P다방을 근거지로 삼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오랜 세월 민주화투쟁을 함께 한 K 전의원과 친분이 깊다. 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목포 출신 주먹으로는 아마추어복싱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이아무개씨가 있다.

그밖에 특정 조직에 몸담지 않은 이 지역 출신 주먹으로 송아무개, 조아무개씨 등이 있다. 송씨는 오종O씨와 더불어 무교동에 터를 잡았는데, 그의 도움으로 상당수 호남주먹이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는데 몇 년 전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주먹계의 한 관계자는 ?송씨는 무척 야물었다(실력이 좋은 주먹을 가리켜 ?야물다?고 한다)?며 ?살아 있었다면 주먹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씨도 송씨처럼 독자적으로 활동한 주먹이다. ?패밀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주먹 실력을 뽐냈다고 한다.

서울로 진출한 호남주먹 중에는 광주?목포 출신 외에도 뛰어난 주먹이 많다. 대표적인 이가 벌교 출신의 문아무개씨. 원로주먹 유지광씨와 동 세대인 그는 당대 최고 주먹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서 건물임대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양 출신의 ?닷소(별명)?는 박종O씨의 윗세대로 호남주먹 가운데 가장 먼저 명동에 진출한 사람이다. 신도호텔이 근거지였는데 유명 가수 조아무개씨의 매니저로도 활약했다.

보성 출신 주먹으로는 이육O씨가 가장 유명하다. 1989년 부산의 100억원대 매립지 이권을 갈취한 혐의로 구속될 당시 언론에 ?3대 패밀리의 대부?로 소개됐다. OB파 두목 이동재씨와 가까운 친척이다. 이승O씨가 조직한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에서 고위간부로도 활동했다.

호남 출신 검사들과의 친분

이씨는 교도소에서 마음을 잡아 출소 후 주먹계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두 아들을 모두 서울대에 진학시켰으며, 현재 일본에 거주한다.

이육O씨가 구속되기 전 청와대에는 이씨가 호남 출신 검사들과 유착됐다는 진정서가 접수됐다. 청와대는 이를 검찰로 넘겼다.

그런데 이 진정서에는 이씨와 친분이 있다는 호남 출신 검사 세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검찰 고위직을 지낸 K변호사, 정치권에 몸담은 P씨, 그리고 현직 검찰 고위간부 P씨로 알려져 있다. 검찰은 이씨와 검사들의 친분을 ?일상적인? 수준으로 보고 ?없던 일?로 처리했다.

이중 한 명은 ?이용호 게이트?에서도 이름이 등장했다. 현재 주먹계에는 검사장급 K씨, S씨가 주먹들과 친분이 깊다고 소문나 있다.

호남주먹의 또다른 축인 전북 주먹의 대표주자는 전주 출신 이승O씨다. 중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해 전주고 재학 시절 전국대회를 휩쓸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이씨는 일찍이 사업가로 나서 1970년대 중반 서울 동대문에서 주류도매상을 경영해 큰돈을 벌었다. 호남주먹들의 후견인으로서 1970년대 후반 ?전쟁?을 벌이는 조양은씨와 김태촌씨의 화해를 중재하기도 했다.

이씨는 5공 정치폭력의 상징인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폭력사건(1987년 4월)에 깊숙이 개입했다. 신민당 이택돈 의원과 이택희 의원과 연계해 폭력배 50여 명을 동원해 6곳의 지구당 창당을 방해한 혐의다. 1990년 3월 검거돼 폭행 등의 혐의로 징역 1년6월형이 선고됐다. 1987년 7월엔 우익청년연합단체 호청련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안기부에서 자금을 지원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재단의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돼 집행유예를 받은 이씨는 현재 모 스포츠협회 고위직을 맡고 있다.

주먹사회에도 상류층이 있다. 이들은 조직을 이끌거나 부하를 거느리지 않는다. 하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다. 조직의 두목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오랜 세월 주먹계에서 쌓아온 명성과 권력과의 친분, 그리고 돈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이름은 전국 어디서나 통한다. 수십억원대의 재산을 갖고 있으며 전화 한통으로 권력층을 움직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호남주먹계 대부들 중에도 상류층 주먹이라 할 만한 사람이 몇 명 있다. 비호남 주먹 중에는 김아무개씨가 꼽힌다. 김씨는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주먹계를 대표한 신상사파의 실세로 통했다. 박정희 대통령 조카뻘에 해당하는 한아무개씨와 의형제 사이.

뿌리 깊은 상류층 주먹

1975년 1월 호남주먹의 ?기린아? 조양은씨로부터 사보이호텔에서 기습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주먹계 표면에서는 사라졌지만 막후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권력기관과의 친분이 힘의 원천이다. 목포 주먹계 거물인 강아무개씨와 친하다.

1993년 슬롯머신사건 당시 ?한국판 마피아?라는 별명으로 신문지면을 장식했던 정덕진씨도 이 부류에 낀다. 주먹계 주변에서 정씨만큼 돈이 많은 사람도 없다. 일찍이 파친코업계에 진출해 ?돈을 쓸어 담은? 그는 1000억원대 재산가다. 동생 덕일씨의 재산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이북 출신인 정씨는 평소 권력층에 줄을 대 놓았는데, 슬롯머신사건 당시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낸 엄삼탁씨, 이건개 대전고검장, 박철언 의원 등이 그와의 관계가 문제가 돼 사법처리됐다.

도박광인 정씨는 1998년 외환관리법위반과 상습도박 혐의로 재구속됐다. 37억 여원을 해외로 빼돌려 카지노 도박자금으로 쓴 혐의였다. 지난해 출소했는데, 얼마 전 ?한국이 싫다?며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영등포 일대가 기반인 이아무개씨도 상류층 주먹으로 볼 만하다. 재산은 조금 못 미치지만 주먹계에서는 실세로 통한다. 역시 권력기관과의 친분에서 비롯된 힘이다. 고 조아무개 의원과 아주 가까웠다. 정덕진씨에게 미국 투자이민이 허가되도록 힘을 썼으며 수감중인 주먹계 거물 K씨의 편의도 봐주고 있다.

지방에 있는 호남주먹은 서울로 진출한 주먹보다 한 수 아래로 치는 경향이 있다. ?이용호 게이트?가 ?여운환 게이트?로 옮겨가자 일부 언론은 여운환씨를 호남주먹계의 대부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표현이다.

1992년 홍준표 검사(현 한나라당 동대문을 지구당위원장)가 광주지검에서 여씨를 구속할 때 너무 요란스러웠던 탓에 여씨가 마치 주먹계 거물인 것처럼 일반에 인식됐지만 실은 ?광주에서 힘이 센 정도?다.

여씨와 친분이 있는 유력인사들도 그를 ?거물 주먹?으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구속 당시 조아무개 의원을 비롯한 이 지역 출신 야당의원 3~4명이 정구영 검찰총장을 방문해 여씨 구속에 항의했다. 검찰 내에서도 여씨를 옹호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이와 관련, 홍씨는 ?당시 검찰 고위관계자인 S씨도 여씨를 수사하는 데 애를 먹였다?고 말했다.

홍씨는 또 ?거물급 로비스트인 O씨의 구명로비에도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O씨는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마당발?로 통한다. 타고난 사업수완과 친화력으로 역대 정권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아 왔다. 전직 검찰총장 J씨, K씨 등과 절친하다.

광주 주먹이 부각된 것은 주먹계에 3대 패밀리 시대가 열린 후다. 공교롭게도 3대 패밀리의 두목이 모두 광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3대 패밀리가 와해되고 ?잘 나가는? 주먹들이 교도소에 들어간 후 광주 주먹계는 특별한 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그 와중에 성장한 조직이 바로 여운환씨가 관련된 국제PJ파다.

주먹계에서 여운환은 싸움꾼이라기보다 ?머리 좋은 주먹?으로 인식돼 있다. 1980년대 중반 서울에서 ?당대 주먹?으로 날렸던 O씨는 ?내가 활동할 때만 해도 여운환이라는 이름은 쳐주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여씨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야문 주먹들이 다 (감옥에) 들어가고 난 후 갑자기 거물이 됐다?고 말했다.

주먹 출신 사업가 B씨는 ?여운환이라는 이름이 주먹계에 알려진 것은 이강O을 따라 일본에 갔다온 이후?라고 말했다(여씨는 1988년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O씨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자 조직과 의형제 결연식을 가졌다).

끊임없이 교도소 들락거리는 주먹들

국제PJ파의 명목상 두목은 여씨가 아니라 김아무개씨다. 김태촌씨의 행동대장 노릇을 했던 양아무개씨가 김씨의 친구다. 양씨는 1990년 김태촌씨와 더불어 범죄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됐는데 현재 참치장사를 하고 있다. 국제PJ파 실세는 조아무개씨다. 조씨는 8년째 징역을 살고 있고 김씨는 6년을 살고 나왔다.

주먹계에서는 여씨가 자신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두 사람을 내세워 조직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두 사람과 관계가 틀어지는 바람에 조직이 내분 위기를 맞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광주에는 그밖에 신양OB파, 충장OB파 등 OB파에서 갈라진 조직과 콜박스파 무등산파 신양관광파 등이 난립하고 있으나 국제PJ파에 눌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포 주먹계에도 절대 강자는 없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아무개씨. 한때 술집을 운영했던 그는 시내에 호텔을 갖고 있는데,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후배들은 1980년대 중반 서울로 올라가 강남 일대 유흥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중 일부가 1986년 서진룸살롱사건 때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유도대 출신의 ?7인조 칼잡이?였는데 주동자인 장아무개, 고아무개씨도 목포 출신 주먹이다.

김씨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진 강아무개씨는 일찍이 뛰어난 사업수완을 바탕으로 지역 출신 정치인들과 친분을 유지해왔다. 그의 부하 중 일부가 서울로 진출해 모 지역의 윤락가를 장악했다. 강씨는 여운환씨와 가깝다.

그밖에 또다른 강아무개, 또다른 김아무개, 천아무개씨 등이 나름의 영역을 갖고 있다. 강씨는 앞서 언급한 김씨의 선배로 경기도 안양으로 옮겨간 지 오래됐다. 또다른 김씨는 주먹실력으로는 최고로 인정받는다. 현재 수배중이다. 무안 출신인 천아무개씨는 서진룸살롱사건 때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살아남았는데 그후 독자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순천에는 양은이파 부두목으로 이름을 날린 강아무개씨가 돋보인다. 1980년 조양은씨와 함께 구속돼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올 2월 출소한 후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배인 또다른 강아무개씨가 그의 뒤를 잇고 있다. 올 2월 구속된 양은이파 계열 오아무개씨도 순천 출신이다. 여수에는 정아무개씨가 유명하다. 알루미늄 샤시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

전북에서 주먹이 드세기로 소문난 곳은 전주, 군산, 익산, 김제 등이다. 전주에서는 월드컵파와 나이트파가 주먹계를 양분하고 있다. 1983년 결성된 월드컵파는 한때 조직원이 100여 명에 이르는 등 이 지역 최대 조직으로 군림해왔다.

두목 주아무개씨는 1990년 ?범죄와의 전쟁? 당시 구속돼 7년형을 선고받고 1998년 출소했다. 출소 당시 대학원 진학을 선언해 화제가 됐으나 올초 검찰의 주요 폭력배 집중단속에 걸려 또다시 구속됐다. 주먹계를 떠나기 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전국구 주먹 이강O의 파워

나이트파 두목 김아무개씨 역시 ?범죄와의 전쟁? 때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월드컵파에 비해 약세인 나이트파는 1980년대 후반 이리(익산)배차장파의 김항O씨가 주도한 일송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익산에는 배차장파가 가장 유명하다. 대부인 김씨는 표면에서 사라졌다. 신아무개씨가 두목인데, 현재 원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행동대장인 윤아무개, 이아무개씨도 구속된 상태다. 김제에는 이아무개씨가 돋보인다. 살인사건에 연루돼 15년형을 살았다. 과거 군산 주먹계의 실력자는 형아무개씨였는데 요즘은 조아무개씨가 실세다.

호남주먹계를 살펴보면 한번 ?낙인찍힌? 주먹들은 계속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비호남 주먹계도 마찬가지다.

부산은 칠성파를 비롯해 영도파 신20세기파 신칠성파가 4파전을 벌이고 있다. 네 조직은 하나같이 두목들이 ?범죄와의 전쟁? 당시 구속된 전력이 있다.

최강자는 모 체육협회 부회장을 지낸 칠성파 두목 이강O씨. 1988년 일본에 건너가 야쿠자와 결연의식을 가진 이씨는 부산 주먹계 대부이자 전국 어디서나 그 이름이 통하는 전국구 주먹이다.

과거 안기부 실세 O씨와 가까웠던 그는 특히 부산 경찰 쪽에 탄탄한 인맥을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1991년 구속돼 1999년 출소했다. 지난해 12월 협박, 세금포탈 등의 혐의로 재구속,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고위층의 경고

칠성파와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여온 신20세기파는 안용O, 정상O씨 두 사람이 두목이다. 그중 안씨는 올 초 검찰에 의해 수배됐다. 불법오락실 영업을 한 혐의다. 영도파는 이강O씨의 친구 천달O씨가 만든 조직인데, 칠성파에 밀린다. 칠성파에서 분가(分家)한 신칠성파는 한동안 칠성파와 죽고죽이는 ?전쟁?을 치렀다. 최근 두목 김영O씨가 이강O씨와 화해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구 주먹계는 동성로파가 휘어잡고 있다. 두목 김아무개씨는 현재 원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박아무개씨가 이끄는 향촌동파는 동성로파에 밀린다.

대구가 배출한 당대 최고 주먹 조창O씨는 올초 출소한 후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6공 실세 O씨와 가깝다고 소문난 조씨는 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후보의 광주 유세 때 경호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에서는 꼴망파가 주름잡고 있다. 건설업자인 두목 최아무개씨는 청송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아직 꼴망파에 대적할 만한 조직이 없는데, 최근 30대 후반의 김정O씨가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르고 있다.

대전에서는 옥O파와 진O파가 쌍벽을 이룬다. 글머리에 소개한 대로 김옥O씨는 지난 8월 수배중 심장마비로 죽었다. 조양은씨를 선배로 따랐던 그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구속돼 조씨와 대전교도소에서 같이 지냈다.

당시 대전교도소에는 현재 여권 실세인 정치권 인사들과 김태촌, 오기준씨 등 거물주먹이 모여 있었다. 목포를 떠나 20년 이상 대전에서 살아온 김씨는 이 지역 일간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대전 목포내기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김아무개씨는 김옥O씨의 선배다. 평소 고위층과의 친분을 과시해온 그는 최근 고위층의 ?경고?를 받고 국외로 나갔다. 진O파 두목 김진O씨는 올초 협박 등의 혐의로 구속됐으나 무죄로 석방됐다. 1990년 ?대전 판?검사 술자리 폭로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경기도 수원에는 과거 전국구주먹으로 이름을 날린 최창O씨의 영향력이 크다. 최씨의 직계로 이석O씨가 있다. 수원에선 오래 전부터 북문파와 남문파가 대립해 왔다. 북문파는 김아무개씨, 남문파는 홍아무개씨가 두목이다. 최근 홍씨는 조직에서 거의 손을 뗀 것으로 알려졌다.

안양 주먹계의 강자는 ?교도소 휴대폰 반입사건?으로 이름을 떨친 안아무개씨다. 얼마 전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안씨의 선배로 조아무개씨가 있는데, 필로폰에 빠져 사실상 주먹생활이 끝난 상태다. 이천에는 김상O씨가 눈에 띄는 주먹.

늘어나는 ?동네 깡패?

충북 청주에는 시라소니파와 파라다이스파의 유혈대결이 잦았다. 청주 주먹계의 대부로 불리는 신용O씨는 파라다이스파를 이끌고 있다. 10여 차례 구속된 경험이 있는데, 지난해 3월 폭행 등의 혐의로 구속돼 4년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충북도장애인연합회장, 청주시농구협회장 등을 지냈다. 충주에는 최석O씨가 있다. 역시 수감중이다. 충남 태안에는 최진O씨가 실세다. 온양에는 김춘O씨(청송감호소 수감중), 보령에는 구백O씨 등이 눈에 띈다.

강원도에서는 원주의 김아무개씨가 유명하다. 김씨는 외국자동차 대리점을 운영해 돈을 벌었다. 정덕진씨와 관계 깊은 장아무개씨가 김씨의 배후에 있다. 강원도에는 그밖에 특별히 두드러지는 조직이나 주먹이 없다. 주문진의 박충O씨가 거론되는 정도다.

경북에서는 영천의 소야파가 단연 돋보인다. 예전엔 소야파가 대구 일대까지 장악했다. 두목 이성O씨는 출소 후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다. 포항 주먹계에서는 이정O씨가 강자다. 최근 출소했다. 경남에서는 진주의 양철O씨, 마산의 이병O씨가 돋보인다. 충무에는 술집 건설업 등으로 돈을 번 문아무개씨가 있다.

제주에서는 산지파 유탁파 땅벌파가 3파전을 벌여왔다. 그중 산지파가 가장 센데, 두목 송아무개씨가 구속된 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국 주먹계 실태를 보면, 전반적으로 ?동네 깡패(군소 조직)?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와 관련, 주먹계의 한 관계자는 ??범죄와의 전쟁?은 실패작?이라며 ?큰 조직은 어느 정도 살려 양지로 끌어들여야 암흑가 질서가 잡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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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 ‘주먹통’ 조승식 검사가 말하는 조폭과의 20년 전쟁
?나는 깡패를 보면 잠이 안 온다? 

부임해가는 곳마다 조폭 토벌작전
‘큰놈?잡을 때는 직접 현장에
김태촌 잡기 전날 밤 정화수 떠놓고 기도
우리 애들이 검사님 손보겠다는데…

호남 주먹의 대부 이육래, 김태촌씨와 부산 주먹계의 거물 이강환, 천달남씨를 감옥으로 보낸 조승식 검사는 주먹계에서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로 불린다. 군산파, 논산 한실파, 광양 라이온스파, 안산 원주민파, 김천 연주파 등 부임해 가는 곳마다 현지 폭력조직을 소탕한 그에게 조폭과의 타협은 없다.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1990년 5월19일 오전 10시.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미주아파트 부근 제일사우나 앞에 3000cc짜리 고급승용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승용차 뒷좌석에는 40대 초반의 남자가 혼자 타고 있었다. 근처에 숨어 있던 수사관들의 무전기가 숨가쁘게 울려댔다. 사내가 사우나탕에 들어가자 안에서 미리 대기중이던 수사관 한 명이 욕조까지 따라 들어가 동태를 감시했다. 사내가 목욕을 하는 동안 운전사는 세차를 했다.

이윽고 목욕을 마친 사내가 사우나를 나서는 순간 수사관 4명이 한꺼번에 덮쳤다. 권총을 빼든 검사가 ?꼼짝 말라?고 소리쳤다. 짐짓 태연한 척하던 사내는 이내 체념한 듯 순순히 수갑을 받았다. 경호원 노릇을 하던 운전사도 함께 끌려갔다.

이날 체포된 사내가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깡패?로 불리던 김태촌(당시 42세)씨다. 그때 구속된 김씨는 지금도 교도소에 갇혀 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권총을 겨눈 검사는? 그가 바로 ?주먹 잡는 검사?로 주먹세계에서 악명 높은 조승식(당시 38세)검사다.

 ?군산에서 깡패공부 다했다?

현재 서울고검에 근무하는 조검사는 사시 19회 출신으로 1979년 서울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주먹수사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81년 전주지검 군산지청에 근무할 때다. 군산 깡패들을 소탕한 그는 이후 ?조폭과의 전쟁?에 몸을 내던졌다. 가는 곳마다 잡아들였고 실패라곤 거의 없었다. 기자가 접촉한 몇몇 강력부 검사들은 한목소리로 그를 ?최고의 주먹검사?로 꼽았다. 그의 수사사례는 오늘날 강력부 검사들에게 거의 교본으로 통하고 있다.

주먹수사가 힘든 것은 범죄의 특성상 증거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간해서는 범죄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두목급 수사는 더욱 어렵다. 게다가 주먹들은 주거지가 일정치 않아 소재지 파악이 쉽지 않다. 범죄혐의가 확인돼 잡으려 해도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만큼 제보와 정보, 탐문에 기대 추적할 수밖에 없다. 주먹수사에 남다른 집념과 끈기가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또 체포과정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부하들을 경호원으로 달고 다니거나 흉기를 소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조검사는 ?군산에서 깡패 공부를 다했다?고 말한다. 도박판 피해자의 제보가 그 계기가 됐다.

?폭력배들이 도박장을 열어 지역 사람들을 끌어들인 후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할 경우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농협 직원 한 명이 빚 독촉과 폭력에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면사무소 계장이 노름빚으로 퇴직금을 날리기도 했다. 수사해 보니 99% 사기도박이었다.?

조검사는 사기도박에 관련된 폭력배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당시 억대 도박판을 벌인 혐의로 구속된 오아무개씨 등은 1990년에 벌어진 ?범죄와의 전쟁? 때 범단(범죄단체) 수괴급으로 인정됐다. 도박판 수사에서 성공을 거둔 조검사는 여세를 몰아 본격적으로 폭력배 수사에 나섰다. 그때만 해도 범단으로 묶는 것이 쉽지 않았다. 법원이 관련법을 적용하는 데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까닭이다. 그 탓에 조검사가 구속한 폭력배들도 주로 개인 차원의 범죄혐의로 기소됐다.

조검사가 군산에서 수사한 사건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당시 한가락하는 주먹인 차아무개씨가 경쟁조직의 두목인 조아무개씨를 칼로 찌른 사건이다. 조검사는 각각 폭행, 공갈 혐의를 적용해 둘 다 구속해 버렸다. 차씨는 1990년대 초 빚쟁이 딸을 강간한 혐의로 서울지검 특수부에 의해 수배되자 미국으로 달아났다. 조씨는 ?범죄와의 전쟁? 때 군산그랜드파의 두목급으로 분류돼 전주지검에 의해 재구속됐다.

 ?조검사와 골프나 쳐볼까?

폭력세계에는 은폐된 칼부림 사건이 많다. 말하자면 누가 찔렸다는 얘기만 있고 누가 찔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이다. 대부분 조직간 싸움이다. 조검사는 이미 잡힌 폭력배들을 고리로 삼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들을 찾아냈다. 이런 식으로 그가 군산에서 잡아들인 폭력배가 수십명에 이르렀다. 그들 중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때는 조무래기들이었는데 뒷날 보니 조직의 두목급들로 성장했더라. 하여간 싹수없고 건들거리는 놈들은 다 잡아넣었다. 그러다보니 군산을 떠난 후에도 나를 음해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폭력배들은 관계기관에 진정을 내 나를 골탕먹이기도 했다. ?수사과정에 맞았다?거나 ?깡패와 골프 치고 다닌다? 따위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골프를 전혀 치지 못했다. 내가 골프를 배운 것은 뒷날 지청장을 하면서다. 나중에 들으니, 어떤 주먹 하나가 사석에서 ?서울에 올라가 조검사와 골프나 한번 쳐볼까? 하고 말한 것이 소문의 발단이 됐다는 것이다.?

군산지청을 떠난 그는 독일국제형사법연구소 객원연구원, 법무부 근무 등으로 한때 수사일선을 떠났다. 그가 다시 ?전공?을 살린 것은 1988년 서울지검 특수1부에 배속되면서부터다. 이후 부산지검 강력부에서 활약한 1991년까지 약 3년간이 그의 조폭수사 전성기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심재륜 검사(현재 고검장)였다. ?고집불통? 심부장과 ?대한민국 깡패들을 모조리 소탕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조검사는 손발이 잘 맞았다.

첫 ?희생자?는 이육래씨였다. 전남 보성 출신의 이씨는 호남 주먹의 실세로 통하고 있었다. 그해 8월 이씨가 구속됐을 때 언론은 그를 ?국내 3대 폭력조직의 대부?니 ?OB파의 대부?니 하면서 요란을 떨었다. 실제로 그는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나 OB파 두목 이동재씨로부터 선배 대접을 받았다. 특히 이동재씨와 가까웠다.

이육래씨의 혐의는 이권 갈취였다. 매립지 인가를 받은 부산의 사업가 송아무개씨를 납치, 서울 이태원의 한 오피스텔에 사흘 동안 감금해 시가 100억원대의 토지에 대한 양도각서를 강제로 받아낸 것이다. 그 과정에 송씨는 김씨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전국 규모의 우익단체인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총재 이승완) 간부이기도 한 그는 서울에서 몇몇 카바레와 나이트클럽 지분을 갖고 있으면서 ?고급 건달? 행세를 하고 있었다. 매립지 업자 납치?폭행사건에는 서아무개, 배아무개씨 등 호청련의 일부 간부가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검사는 이씨를 비롯해 4명을 구속했다.

이육래와 호남 출신 검사들

조검사가 이씨를 수사하기 직전 이씨가 몇몇 호남 출신 검사와 친분이 깊다는 진정서가 청와대에 접수된 일이 있었다. 청와대는 이를 검찰에 넘겼는데, 조사를 벌인 검찰은 진정서에 이름이 거론된 검사들에게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검찰 안팎에선 이씨의 검찰 인맥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처음엔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씨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행방을 감췄기 때문이다.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와 이씨 수사 상황을 관심 있게 물어보기도 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화가 몇 차례 걸려왔다. 무언의 압력이었지만 조검사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깡패 수사는 집요하게 달라붙어야 성공할 수 있다. 한번 외압에 흔들리면 그 다음부터는 수사하기 힘들다. 나는 늘 하늘이 무너져도 잡아넣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이육래를 잡아넣을 때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 왔다. 외압이라는 건 수사검사가 흔들릴 때나 해당되는 말이다. 부담을 느끼긴 해도 압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외압이란 건 있을 수 없다. 또 수사검사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넣는 경우는 드물다. ?어떻게 돼가냐?고 물어보는 정도다. 나는 애초 압력이라는 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였다.?

이씨를 잡은 것은 치밀한 정보수집과 오랜 잠복근무 덕분이었다. 이씨의 재산을 샅샅이 뒤진 수사팀은 그가 서울 시내 모처에 빌라 형태의 별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부터 별장 주변에 숨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잡힌 것은 수사 착수 한 달 만이었다.

조검사는 이씨로부터 100장에 이르는 자술서를 받아냈다. 거물급 주먹으로부터 그토록 방대한 양의 자술서를 받아낸 것 자체가 기록적인 일이라 검찰 내에서 화제가 됐다. 이씨는 자술서에 성장과정과 주먹세계에서 살아온 얘기를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주먹계 세력판도가 파악됐다. 검찰 고위층은 이씨의 자술서를 강력부 검사들에게 ?교재용?으로 돌렸다.

그런데 조검사는 이 자술서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이씨가 자술서에 자신이 아는 몇몇 검사의 이름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호남 출신인 그들은 조검사의 선배들이다. 당사자들은 크게 분개했고 그 일로 조검사는 두고두고 부담을 안게 됐다. 이씨는 이듬해 2월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1월 검찰은 서울지검에 민생특수부를 설치했다. 민생특수부는 검사5명, 경찰관15명, 검찰수사관 24명으로 편성돼 조직폭력 인신매매 음란퇴폐사범 등을 전담했는데 그해 5월 강력부로 이름을 바꿨다. 심재륜 특수1부장이 민생특수부장을 겸임했다. 심부장을 따라 조검사도 민생특수부로 옮겼다.

김태촌의 허리춤을 붙들다

민생특수부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대형 주먹수사를 기획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지구당창당 방해사건의 배후 혐의를 받아온 호청련 회장 이승완씨와 당시 국내 최대폭력조직인 범서방파를 이끌던 김태촌씨가 표적이었다. 이씨는 함승희 검사(현재 민주당 의원)가, 김씨는 조검사가 맡았다. 그런데 민생특수부 발족 이전에 이미 김씨는 검찰 수사대상에 오른 상태였다. 이육래씨 수사가 한창이던 1989년 8월 대검에 김씨의 비위사실을 알리는 진정서가 접수된 것이 그 출발이었다. 대검으로부터 진정서를 넘겨받은 서울지검 특수1부는 비밀리에 김씨 수사를 준비했다.

?민생특수부가 발족하면서 전시상태에 돌입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것은 1990년 10월이지만, 실제로는 1989년 여름 이육래를 수사하면서 조폭과의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공식 선전포고가 늦었을 뿐이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될 무렵 검찰은 이미 상당한 전과를 올린 상태였다.?

1987년 인천 뉴송도호텔사장 황아무개씨를 칼로 찌른 혐의로 구속됐던 김태촌씨는 1989년 1월 폐암판정을 받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후 신우회라는 조직을 결성한 상태였다. 기독교 친목모임을 표방했는데, 검찰은 이를 범단으로 규정했다. 출소후 순복음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김씨는 조용기 목사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가 ?회개?했다고 믿은 조목사는 그를 종교집회에 데리고 다녔다.

검찰은 먼저 김씨의 출소 이후 행적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그가 제주도 서귀포 KAL호텔과 광주 신양파크호텔 파친코 운영권 강탈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문제는 그를 어떻게 잡느냐는 것이다. 당시 김씨의 주거는 경기도 파주군의 오산리기도원에 제한돼 있었다. 규정에 따르면 주거지를 연속 30일 이상 벗어나면 형집행정지가 취소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김씨는 한 달에 며칠 정도 기도원에 머물렀는데 진짜 은신처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수사팀은 김씨 주변 사람들의 전화통화를 추적하고 끈질기게 탐문수사를 벌인 끝에 그가 서울 동부이촌동의 미주아파트에 숨어 지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체포하기 한 달 전쯤 일이었다. 조검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파트 근처에 수사관을 잠복시켜 김씨의 행동 반경을 정확히 파악했다. 김씨는 거의 매일 밤 늦게 집에 돌아왔고 오전 10시쯤이면 늘 아파트 부근의 제일사우나로 향했다.

남은 문제는 수사기밀 유지였다. 김씨는 거물답게 경찰은 물론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 곳곳에 비호세력을 두고 있었다. 김씨의 ?정보원?들은 수시로 수사팀의 움직임을 염탐했다. 이들 중 일부는 김씨 수사가 극비리에 진행되자 ?도대체 김태촌을 수사하기는 하는 거냐? 하며 수사팀을 자극해 정보를 캐내려 했다. 몇몇 사회지도급 인사는 직접 전화를 걸어 수사방향에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수사팀이 김씨의 은신처를 알아내고도 곧바로 검거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한마디로 완벽하게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외출할 때 늘 20명 이상의 부하와 동행했다. 이들이 있는 한 물리적 충돌이 불가피했다. 수사팀은 꾀를 냈다. 수사정보를 캐러 검사실에 들르거나 전화하는 사람들에게 ?김태촌이 부하들과 떼지어 다니는데, 계속 그러면 형집행정지를 취소할 수 있다?고 은근히 ?역정보?를 흘린 것이다.

김씨의 정보력은 과연 대단했다. 곧바로 경호원 수를 한 명으로 줄인 것이다. 그 한 명은 운전기사 겸 경호원이었다. 김씨를 속이는 데 성공한 수사팀은 D데이를 5월19일로 잡고 몇 차례 예행연습까지 마쳤다. 체포장소는 사우나탕으로 결정했다.

드디어 검거 당일, 조검사를 비롯해 총 6명이 출동했다. 조검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허리에 찼다. 김씨가 나타나기 전 수사관 한 명이 미리 사우나에 들어갔고, 나머지 4명은 조검사와 함께 밖에 대기했다. 당시 조검사는 두렵지 않았을까.

?내가 직접 김태촌의 허리춤을 잡았는데 저항을 포기한 듯 허리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태촌의 경호원이기도 한 운전사는 체격이 엄청 좋은 칼잡이 ?꼬마?였는데, 두목이 고분고분 잡히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내사하는 데 6개월, 잠복?감시하는 데 1개월이 걸렸다. 이런 얘기는 처음 하는 건데, 체포 전날 밤 집에서 정화수 떠놓고 일이 잘 되길 기도했다. 그날 밤 김태촌 꿈까지 꾸었다. 체포 직후 심재륜 부장에게 보고한 후 김태촌을 차에 태우고 검찰청사로 오는데,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김씨를 잡아들인 조검사는 곧바로 이아무개씨 수사에 나섰다. 김씨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범서방파의 방계조직을 이끌던 이씨는 김씨가 구속된 직후 마카오로 달아났다. 이씨가 검찰 수사망에 걸려든 것은 김씨가 검거될 때 갖고 있었던 1억원짜리 당좌수표 2장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김씨를 추궁해 그 수표가 이씨로부터 나온 것임을 밝혀냈다. 게다가 소문에 실려온 이씨의 발언이 조검사를 자극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이씨가 자기의 아픈 친구를 잡아넣었다며 ?조승식 이 새끼, 가만 안 둔다?고 말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이씨는 위장 철강회사를 세우고 홍콩에 본사가 있는 것처럼 꾸며 외화 300만달러를 밀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일찍이 마카오 카지노에 진출한 그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고리의 도박자금을 대주는 일을 했는데, 국내에서 부하들을 시켜 빚을 받아낸 다음 해외로 송금하게 했다.?

바람잘 날 없는 부산의 암흑가

조검사는 이씨의 국내 하수인들을 구속하는 한편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는 이씨를 수배했다. 그런 다음 마카오 카지노에서 거액의 도박을 일삼은 한국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검사는 이 사건을 끝까지 조사하지 못했다. 수사 도중인 그해 8월 부산지검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후배인 남기춘 검사(현 부산지검 마약수사부장)가 후속수사를 맡았다. 김태촌씨에 대한 보강조사도 남검사 몫이 됐다. 남검사는 두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해외카지노 도박사건의 경우 그해 10월 재벌2세 장아무개씨 등 23명을 상습도박 및 외환관리법위반 혐의로 무더기 구속했다. 남검사는 또 그해 12월 김태촌씨를 범단 조직혐의로 추가기소했다.

부산지검 강력부로 발령난 조검사는 수석검사로서 부산 주먹 토벌에 나섰다. 당시 부산에서는 전국적으로 강세인 호남 주먹도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부산 주먹의 판도는 4파전이었다. 칠성파, 신20세기파, 영도파, 신칠성파 등 4개 조직이 부산의 암흑가를 분할하고 있었다. 그중 최대 조직은 일본 야쿠자와 결연의식을 가졌던 칠성파였다.

조검사에 따르면 칠성파의 조직형태는 일본 야쿠자처럼 두목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다. 두목 밑에 각 구역 책임자가 있고, 각 구역은 다시 여러 개의 소구역으로 나뉘어 각각의 책임자가 있었다. 부산 시내 중심가를 휘어잡고 있던 신20세기파는 안용섭?정상수씨 두 사람이 공동으로 두목을 맡고 있었다. 안씨는 조직관리를, 정씨는 대외관계를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이 보기 드문 ?공동 두목제?는 대법원 판결에서도 인정됐다.

영도파와 신칠성파는 둘 다 칠성파와 관련이 깊다. 영도파 두목 천달남씨는 과거 칠성파 두목 이강환씨의 친구였다. 김영찬씨가 두목인 신칠성파는 이강환씨에게 반기를 든 칠성파 조직원 일부가 집단으로 이탈해 만든 조직이다. 이들 네 조직간의 영역 다툼으로 부산 암흑가는 바람잘 날이 없었다. 조직간 칼부림은 예사고 살인사건도 일어났다. 특히 칠성파와 신칠성파의 충돌이 심했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한창 깡패 수사가 불붙고 있었다. 각 파 조직원의 명단을 파악해 그들의 전과기록과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다. 과거 은폐된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고 이름이 알려진 폭력배들의 여죄를 찾았다. 밖에선 몰라도 주먹세계에는 누가 한 짓인지 알려져 있다. 한두 명을 잡아 추궁하면 범인이 잡히지 않아 묻혀진 과거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다.?
  
영도파 두목의 여인과 공중전화

부산 주먹의 최강자로 ?전국구 주먹?으로 통하는 이강환씨는 조검사가 부하들을 잡아들이고 자신에 대한 수사망을 좁혀오자 부산을 떴다. 영도파 두목 천달남씨도 마찬가지였다. 조검사는 두 사람을 전국에 수배했다.

먼저 잡힌 사람은 천씨. 조검사가 직접 천씨의 은신처인 대구까지 가서 잡아왔다. 천씨를 잡는 과정도 김태촌씨를 검거할 때처럼 드라마틱했다. 천씨 주변 사람들을 찾아나선 수사팀은 천신만고 끝에 천씨와 관계가 깊은 한 여인의 집을 알아냈다. 그 집 전화를 장기간 도청한 결과 천씨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었다.

전화 발신지를 추적하니 대구였다. 천씨는 용의주도했다. 철저하게 공중전화만 이용했는데, 그것도 장소를 옮겨가며 걸었다. 조검사는 2만5000분의 1 지도를 펴놓고 천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그 발신지를 점으로 찍어나갔다. 천씨가 사용하는 공중전화 부스는 20여 개로 파악됐다. 그러던 중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 매일 처음 걸려오는 전화의 발신지가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 이는 천씨가 은신처에서 가까운 공중전화 부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근방에 천씨의 은신처가 있으리라 짐작한 조검사는 수사팀을 꾸려 대구로 날아갔다. 지도를 통해 파악해둔 공중전화 부스 주변에 수사관들을 잠복시켰다. 1991년 1월16일, 여느 날처럼 공중전화 부스에 나타나 전화를 걸고 은신처로 돌아가던 천씨는 새벽부터 잠복한 수사관들에 의해 체포됐다. 체포 당시 천씨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천씨의 얼굴을 아는 수사관이 있어 식별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조검사가 현장지휘를 했다. 김태촌씨를 잡을 때도 그랬지만 ?큰 놈을 잡을 때는 직접 움직여야 마음이 놓인다?는 원칙 때문이다. 고도의 작전을 쓰려면 검사가 현장에 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부산 주먹의 대부 이강환씨가 잡힌 것은 그 석달 뒤인 1991년 4월이다. 서울에서 시경특수대에 의해 체포됐다. 부산지검에서 수배령을 내린 까닭에 이씨의 신병은 부산지검 강력부로 넘겨졌다. 이씨는 1989년 3월 행동대원들을 시켜 신칠성파 두목 김영찬씨를 회칼로 난자해 12주의 중상을 입히고, 같은 해 5월 역시 행동대원을 시켜 신칠성파 중간보스 김아무개씨의 다리를 회칼로 절단케 하는 등 10여 차례에 걸쳐 폭력을 배후조종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조검사는 이씨를 천달남씨와 마찬가지로 주먹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범단조직 혐의(두목은 징역 10년 이상 무기?사형 가능)로 구속했다.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검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부산 주먹계를 휘저어놓은 조검사는 이강환씨를 잡아들인 후 부산을 떠났다. 새로운 임지는 대전지검 강경지청. 지청장으로 부임한 그는 충남 논산 유흥가를 주무대로 서민들을 갈취해오던 폭력조직 한실파를 초토화했다. 약 50명의 조직원을 파악해 그중 20여 명을 구속하는 한편 두목 정지택씨를 비롯해 달아난 조직원 전원을 수배했다.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검사

다음 임지는 광주지검 순천지청. 어느 검찰청이든 조검사가 부임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 지역 폭력조직을 파악하는 것이다. 순천지청 부장검사로 부임한 그는 광양 일대의 최대 폭력조직인 라이온스파에 대한 수사를 기획했다. 이영렬 검사(현 대검 연구관)에게 첩보를 수집케 하고 내사를 시작했다. 그 결실은 조검사가 떠난 직후 나타났다. 1993년 초 이검사는 광양 라이온스파 조직원 36명을 구속하는 개가를 올렸다.

대구지검 강력부장 시절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임기가 워낙 짧았던 탓도 있지만, 조검사의 말대로라면 ??범죄와의 전쟁? 탓에 워낙 많이 잡혀 들어가고 도망가버려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검사는 6개월 만에 수원지검 강력부장으로 옮겨갔다. 안산은 그때껏 ?범죄와의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못한 지역이었다. 조검사는 그곳에서 안산 원주민파를 소탕했다. 주임검사는 이기동 검사(현 광주지검 장흥지청장)였다. 검찰이 입건한 조직원만 해도 75명이다. 숫자로 봐선 전국적으로 꼽힐 만한 큰 조직이었다. 그중 23명을 구속하고 달아난 조직원들을 전원 지명수배했는데, 그 뒤로도 꾸준히 잡아들였다.

조검사는 수원지검 근무를 끝낸 후 대전고검을 거쳐 대구지검 김천지청장에 부임했다. 그곳에서도 그의 관심은 변함없이 ?주먹?이었다. 김천지청은 연주파 행동대장 김창기씨 등 33명을 범단 조직 및 가입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달아난 두목 박연주씨 등 31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주임검사는 최윤수 검사(현 부산지검 검사)였다.

김천지청장 다음으로 맡은 직책은 인천지검 형사1부장. 그 시기에는 특별한 주먹수사가 없었다. 그후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검 총무부장, 인천지검 부천지청 차장검사를 거쳐 지난해 7월 서울고검으로 옮겼다.

폭력배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검사들은 종종 ?역공?에 시달린다. 주먹들이 검사를 괴롭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직접적인 위협이나 협박이고 또 하나는 투서나 진정서 등을 통한 흠집내기다. 조검사는 아직까지 신체위협이라고 볼 만한 일은 겪어보지 못했다. 1989년 주먹수사로 한창 이름을 날릴 때 폭력조직의 일원으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집에 전화해 죽이느니 살리느니 협박한 것이 고작이다.

주먹들이 노골적인 위협보다 애용하는 수법은 은근한 협박이다. 1990년 12월 초 조검사의 근무지인 부산지검 강력부에 김태촌씨의 누나가 찾아왔다. 김씨의 누나는 ?대전 판?검사 술자리 사건(대전의 일부 판?검사들이 폭력배 두목들과 룸살롱에서 어울린 사건으로 진술파 두목 김진술씨의 법정 폭로로 세상에 알려짐)?으로 사표를 낸 김아무개 부장검사 얘기를 들먹인 후 조검사를 걱정(?)해주는 듯한 얘기를 하고 돌아갔다. 당시 김태촌씨에 대한 1심 재판은 증인 불출석 등으로 파행을 겪고 있었는데, 조검사는 부산에 있으면서도 김씨 재판에 관여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이 검사님 손보겠다는데…?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수사검사를 직접 위협하지 않는다. ?수호지?를 보면 싸움수칙 제1조는 ?관군과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사에 대한 신체위협은 어설픈 조직에 있는 놈들의 영웅심에서 빚어진 것이다. 머리가 돌아가는 깡패 두목들은 ?검사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 드리는데…? 하면서 ?우리 애들이 검사님을 손보겠다는 것을 말리고 있다?는 식으로 돌려 말한다. 그러면 나도 이렇게 맞받아친다. ?야 나도 걱정이다. 너를 괜찮은 건달로 생각하는데, 후배 검사들이 모조리 잡아들이겠다고 난리를 치니 말리는 데도 한도가 있지 않느냐?.?

흑색선전에 의한 압박도 폭력배들이 검사에 대항하는 전형적인 수법 가운데 하나다. 김태촌씨가 범단 혐의로 기소되기 직전 검찰 주변에서는 주요 폭력조직의 두목들이 가족이나 부하를 동원해 자신들 수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검사 세 명에게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검사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폭력배들이 떠들어댄 조검사의 ?비리?는 ?군산지청에 근무할 때 단골 술집 여종업원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상처를 입히려는 시도다. 조검사는 이 ?비리?의 진실 여부에 대해 ?깡패 수사를 하면서 약점 잡히는 짓을 한다면 배겨날 수가 없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깡패들이 검사를 골탕 먹이는 수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진정이나 투서다. 수사과정에 그런 것이 관계기관에 접수되면 상부에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 자식, 왜 이렇게 수사를 시끄럽게 하는 거야?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공조직의 생리다. 깡패들이 그 점을 꿰뚫어보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80년대 초 군산에서 깡패들을 잡아들이면서 ?악질? 소리를 들은 이후 술자리에서 몸가짐을 조심해왔다. 83년 이후 여자 나오는 술집엔 가지도 않는다. ?평생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면서 너희들(깡패들)을 괴롭혀 주겠다?고 다짐했다. 80년대 후반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심재륜 부장을 처음 만났는데, 그분도 나와 생각이 비슷했다. 심부장과 한팀을 이뤄 수사할 때 우리에게 외압이라는 건 통하지 않았다.?

조검사는 왜 그토록 주먹수사에 정열을 바쳤을까. 그의 답변이 재미있다.

?잠 안 자고 열심히 연구해 깡패를 잡으면 남다른 보람을 느낀다. 나는 나쁜 놈을 보면 잠이 안 온다.?

조검사는 주먹수사에서 일절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깡패 또는 깡패 출신이 저지른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범죄라도 절대 봐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똑같이 무허가 술집을 운영했더라도 깡패 출신에게는 오히려 관련법을 더 엄격하게 적용해 왔다. 그 탓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깡패를 보면 잠이 안 온다?

깡패 두목이나 깡패 출신 사업가에게 검찰 고위직을 지낸 변호사가 붙으면 수사검사로서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이런 거물급 변호사는 대개 선임계를 내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검사 또는 그 윗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이용호 게이트에서 드러난 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역할이 그 경우다. 검찰 안팎에서는 수사검사가 거물급 변호사의 부탁을 무시할 경우 음해성 소문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중반 이후 조검사가 거쳐간 보직을 살펴보면, 이른바 ?잘 나가는 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강력수사통인 그가 수사권이 없는 한직으로 도는 것에 대해 ?주먹수사의 후유증?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흥미롭다.

즉 과거 조검사가 주먹들을 수사하는 과정에 구설수에 올랐던 검사들 가운데 고위직에 오른 이들이 그를 ?물 먹여 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조승식 검사에 대한 인사에는 보복으로 비치는 측면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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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신동아 기자/ 신동아 2001. 11월호>

한국 현대사에서 세상이 어지러울 때 어김없이 기승을 부리는 집단이 있다. 조직폭력배(일명 조폭)가 그들이다.
 4·13총선, 유흥가의 호황 등과 맞물리면서 그들의 활동이 활발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10대 폭력배들이 활개를 치며 조폭세계에도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고 있다. 주먹의 세계를 보통 3기로 나누는데 제1기는 일제시대의 주먹으로 이들은 명분과 대의를 중요시 여겼다.2기는 6·25이후의 시기로 이 때 주먹은 정치적 사건과 연계되면서 이들은 정치깡패의 성향을 나타낸다.

조양은, 김태촌 등으로 대변되는 3기를 지나 요즘은 10대 조직폭력배들이 신흥조직을 만들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권력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루며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는데 한 축을 담당했고, 사회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의 변천사를 통해 사회의 흐름을 알아본다.

▲제1기 //‘협객’을 자처한 그들.
이성순(시라소니), 김두한(잇뽕), 고희경(구마적), 엄동욱(신마적)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들은 협객을 자처했다.
일제시대의 주먹들은 핍박받는 민중의 삶과 같았다. 식민시대의 설움과 울분을 가슴에 품었던 그들은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 여겼다.
지금처럼 칼, 쇠파이프 등 각종 무기가 난무하거나 뒤에서 공격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1기는 크게 조선주먹과 일본주먹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조선주먹들은 이제 갓 걸음마를 걷기 시작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은 미미했으며, 조선주먹이 가진 이권도 신통치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일본 야쿠자들은 일본도로 중무장한데다 고급술집 등 자금줄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일본 주먹의 보스는 ‘장군의 아들’로 알려진 하야시. 하야시는 평안도 출신으로 본명은 선우 영빈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월등한 일본패에 항상 밀리던 조선패가 거대조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종로 우미관극장을 주 활동무대로 활약한 김두한패의 등장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우미관패는 수표교(명동과 종로의 정계) 전투에서 일본패에 무참히 패하고 조직원들이 징병으로 끌려가면서 조직은 와해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조선주먹패가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2기 //정치깡패의 출현

해방공간에서의 깡패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했다. 항상 혼란의 시기에는 그들의 힘이 막강해진다는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 것.
이 시기 깡패들은 좌우익 대립 속에 정치와 밀착하기 시작했다.
장충동 정치테러 사건을 비롯 4·19를 촉발시켰던 고대생습격사건 등 이 시기의 주먹들은 정치인들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
김두한이 대한민청 감찰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일선에 뛰어들자 주먹세계의 판도는 급격히 변했다.
명동과 동대문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주먹계의 두 축을 형성했다.
명동은 만주와 이북에서 활동했던 주먹들, 이성순(시라소니), 이화룡 등이 포함돼 있었고 동대문에는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이 있었다.
그러나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이승만은 깡패들을 잡아넣게 되고 이 와중에 명동은 완전히 무너졌고 동대문만 살아남게 됐다.
동대문사단이 ‘권력의 우산’ 속에서 비를 피한 것이다.

동대문의 보스 이정재는 야망이 대단했다. 대권까지 노렸던 이정재는 전국대회에서 세 번 우승한 탁월한 씨름꾼. 그의 손에 잡히면 어느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힘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자유당정권의 2인자 이기붕과 손을 잡으며 정치 판에 뛰어든다.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에 난입,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개헌 통과에 한 몫을 했던 이정재는 장충동 테러 사건(야당 발기인대회 방해 사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권력의 맛을 본 이정재는 경기도 이천을 기반으로 국회의원에 도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기붕이 이 곳에 출마를 선언하자 그와 결별하게 되고 그것이 그의 몰락을 가져 왔다.
이정재의 뒤를 이은 것이 임화수.
임화수는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됐으며 동대문사단을 움직이는 일인자로 자리매김한다.
힘으로 얻은 권력은 힘에 의해 무너지는 법.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군사정부는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깡패들을 줄줄이 재판에 회부했고 단죄를 내렸다.
이정재, 임화수는 형장의 이슬로, 유지광은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아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렇듯 격동의 시대에 등장했던 주먹들은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이 시기는 분명 주먹의 황금시대였다.

▲제3기 //‘회칼’의 등장

군사정권는 초기 부정부패와 해소, 구악일소를 내세워 주먹을 탄압했다.
그러나 잡초는 밟아도 끈임없이 자라는 법.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지방의 깡패들이 상경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1975년 명동의 사보이 호텔에서 주먹계의 판도를 바꾸는 사건이 벌어진다.
서울 중심가를 장악하던 신상사파와 주먹계의 원로들이 모여 신년모임을 가지던 중 조양은이 이끄는 전라도파(후 양은이파)가 습격한 뒤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다.
또 광주에서 올라온 김태촌의 서방파도 상경, 주먹의 한 축을 담당한다.
양은이파와 서방파, 이동재의 OB파 등 호남 3대파가 서울의 주먹세계를 분할 점령하게 됐다.
이 시기는 정치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세대교체를 부르짖던 때.
주먹세계도 이런 추세에 발맞춰 새로운 세력이 급부상하게 된 것.
80년대 부산쪽에서는 일본 야쿠자 조직과 최초로 손을 잡은 국제적인 폭력조직인 칠성파가 장악하게 된다.
이 시기는 회칼, 일본도, 쇠파이프 등 갖가지 무기들이 등장하게 되고 기습적인 공격이 유행하게 된다. 비겁해지고 흉포화하기 시작했다.
정치와 연계는 이 시기에도 계속됐다.
87년 호헌철폐, 직선개헌을 내세운 김대중, 김영삼씨가 통일민주당 창당을 시작하는데 지구당 창당때 주먹패들이 방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명‘용팔이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후에 5공 핵심인사 장세동(당시 안기부장)씨가 계획해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밖에 94년 슬롯머신사건, 98년 한나라당 서울역집회 방해사건도 조직폭력배가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시각.

▲제4기 //몇 명만 보이면 ‘조폭’

이번 총선에서 386세대 등 젊은 피들이 대거 출마, 정치권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주먹세계도 마찬가지.
이제 새로운 시기에 맞춰 젊은 세대들이 조직폭력배로 탄생하고 있다.
소규모로 구성된 군소 조폭들이 대도시 유흥가를 중심으로 겨울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검찰과 경찰은 전국적으로 조직폭력배가 400여개파에 1만2000여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찰이 지난해 12월부터 1월 중순까지 전국에서 검거한 신흥조직 57개파 788명을 검거했다.
그중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이 전체 77.3%(609명)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 조폭등의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 거대 ‘패밀리’ 형태로 운영되던 폭력조직이 10代의 소규모 조직으로 분화되고 있는 것.
이는 계보를 거느린 대조직의 경우 수사기간에 노출되기 쉽고 조직을 이끌 자금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범죄단체를 구성한 두목급에 대해서는 최고 사형까지 처벌할 수 있는 중형이 선고되기 때문에 이 같은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10대들의 조폭 가담은 일선 학교의 불량서클을 모태로 하고 있다.
학교 내에서 동료학생을 상대로 금품갈취와 폭력을 행사하던 이들이 퇴학이나 정학 등을 통해 사회의 폭력조직에 진출하게 된다.
이들은 각 조직의 행동대원으로 활약, 학교후배를 조직에 끌어들인다.
이후 일정한 노하우가 쌓이면 이들은 조직에서 뛰쳐나가 새로운 조직을 만든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에는 몇 명만 모이면 조직을 만든다”며 “10대들이 활개를 치면서 점차 흉폭해지고 있다. 폭력조직에 몸담기 전인 학교나 가정에서 문제학생을 잘 선도한다면 이 같은 현상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