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젓가락이 짧고녀
유년시절,
후암동 꼭대기 우리 집은 마당이 꽤 너른 편이었다.
황토를 곱게 빻아 분진가루를 뿌린 듯한 마당은 언제나 뽀송뽀송했다.
한 귀퉁이엔 채송화와 나팔꽃, 맨드라미가 피어나고
뒤뜰엔 아주 널찍한 장독대가 있었다.
三代가 한지붕에서 살았는데
삼촌들과 고모는 죽어라 팝만 듣고
할아버지는 당신의 재산목록 제1호인 축음기로 클래식만을 고집했다.
사실은 할머니가 더 고집을 부렸다.
오로지 전통가요만 즐겨 들었으니까.
그 틈새에 낀 내 나는 늘 짬뽕이었다.
여름밤이면
밤잠을 설친 고모와 나란히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구경했는데
하늘은 그야말로 까만 자개 상이었다.
연초록으로 빛나는 은하수 위에
새파란 빛을 띤 왕별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간혹 나는 장독대에서 별을 헤는 아이가 되곤 하였다.
용산고등학교에서
용산 꼬마라고 불리는 큰 삼촌은 소위 학생 깡패였다.
학교에 늘 불려다니던 할머니가 본인보다 출석 일수가 더 많았을 정도니까.
그러나 4.19 혁명 때 제일 용감했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그 전설은 순전히 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무용담이어서
옆구리에 스치고 지나간 총알자국이라는 것도 그저 불에 데인 듯한 느낌일 뿐
신빙성이 매우 낮은 증언이다.
그 삼촌이 어느 날
막걸리 냄새 휘휘 풍기면서
밤하늘에 떠있는 휘영청 한 달을 보고 시 한 수 읖조렸다.
"내 너를 품을 수 있는 날이 언제련고
내 너를 술안주 삼을 날이 언제련고
아, 젓가락이 짧고녀.... "
우히히, 키득키득,
고모와 나는 그렇게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때 그 시절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