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나의 애마, 로시난테 씨에로
시인 김상훈
2009. 7. 22. 05:18
갓 시집을 오던 해에 찍은 너의 모습을 보니
넉넉한 주인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아 많이 안쓰럽구나.
쇠붙이에 불과한 너에게 무슨 미련이 남아 그러느냐 하겠지만
16년 동안 함께 했던 시공간을 생각하면
결코 가볍게 볼 문명의 이기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너는 어쩌면
주인의 비밀을 고스란히 안고 무덤까지 갈지 모른다.
그리하여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라는 의미로
며칠 치료를 계속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직 물이 새는 너를 보면 머리에서 ♨이 난다.
너는 이제
기름은 둘째 치고 매일 물을 넣어야 가는 차가 됐다.
하지만 귀찮아도 나는 너를 끝까지 보살필 작정이다.
그동안 함께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차디찬 쇠붙이임에도 애잔한 마음이 앞서는구나.
너와 함께 했던 사계가 고스란히 추억으로 남아 고마울 따름이다.
다음 생에는
부디 고급 차로 태어나
부유한 주인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도 너는
이판장(280) 짓고 구땡(99)이다.
나니까 그런 차번호 받은 거라고 생각하렴.
그동안 구땡 달고 다니는 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네가 생명이 다하는 날
나는 너의 윤회를 생각하며 막걸리 한잔할 생각이다.
그러니 이젠 제발 어디 더 망가지지 마라.
막판에 너와 나의 관계가 상당히 심각해 질 우려가 있다.
돈 없다.
그러니 죽기밖에 더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