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이름 모를 夜花여

시인 김상훈 2009. 4. 18. 03:47

 

 

텅 빈 거리의 일각엔 스러진 종탑이 보이고 어둠을 짊어진 시간은 새벽으로 달려가는데 부러진 깃털로 싸구려 화장을 한 창백한 얼굴들이 초량동 텍사스촌 골목마다 흰 꽃신 되어 떠돈다. 필시 강팔지고 모지락스러운 세속적 인과(因果)의 필연성이 그미들을 어두운 거리로 내몰았을 터이다. 그 어둠 속에서 더러는 부활하는 망령처럼 도화살이 도지거나 더러는 해바르게 살기를 소원하는 참삶의 의미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를 곱씹으며 푸시킨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 원망은, 희미한 붉은 등 아래 여기저기 감춰진 튼 살 위로 사랑 없는 지폐가 흩날릴 때마다 고향땅을 바라보며 한 뜸 한 뜸 수놓았을 눈물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새벽, 빗살 무늬를 그리는 외등 밑에 우산 대신 모자를 쓴 야화(夜花)가 담배를 꼬나물고 서 있다. 짧은 치마와 부츠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가 눈부시다. 봄꽃이 무성한 계절일지라도 조금은 추웠으리라. 이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튕겨나간 담뱃불이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순간까지 그녀는 마치 애니메이션 속의 주인공 같고 방금 크로키 당한 그림 같다. 가장 늦게 문을 닫는다는 국숫집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마저 거두어간다. 그녀는 왜 이 시간까지 서성이고 있을까. 문득, 모노드라마 "어느 늙은 창녀의 노래"가 떠오르고 사랑의 완성을 외치던 극(劇) 속의 주인공이 오버랩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