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지금도 풀지 못하는 빌어먹을 화두

시인 김상훈 2009. 4. 9. 06:54

 

 

연초록빛 눌눌한 하늘, 바람 한 쌍 시비가 멎자 꽃비가 내렸다. 하늘 개인 날, 눈부신 변이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옥란(玉蘭) 가지에 앉아 잰걸음 잗디디며 귀 따갑게 자기 존재를 알리는 꾀꼬리. 그 소리는 투깔스러운 원시성을 감추지 못하고 수려한 우관(羽冠)이 떨리도록 아침 강 노 저어가는 피울음이었다. 그때쯤이면 필시 마당 어귀에 쌓인 꽃비를 쓸어내라는 큰 스님 당부도 까맣게 잊은 채, 아침 식곤증으로 어디선가 입 달싹거리며 졸고 있을 동자승이 떠올랐다.

 

하루 중 절반은 분명히 눈부신 낮이건만 달포를 암자에 머물면서 이상하게 나는 달빛 없는 밤과 새벽만 무수히 보았다. 아침에 잠시, 마당 어귀에 내린 꽃비를 보곤 아침 공양도 거른 채 곧바로 혼곤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눈부신 낮을 볼 수 없었던 이유였다. 어제의 희로애락은 거짓이고 오늘의 희로애락은 진실이네. 왜 그런가. 절집에서 공양 보살로 있기엔 너무 앳된 공양주를 보고 계속 의문을 품었던 것처럼 어느 날 새벽, 큰 스님으로부터 이런 화두를 받곤 머리가 지끈거렸다.

 

빌어먹을. 대체 그 화두랑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산하는 날까지 그 화두는 종래 풀리지 않았고 내 배낭 속엔 앳된 공양주가 넣어준 누룽지가 들어 있었다. 하산길에, 그동안 무수히 보았던 새벽을 떠올리면서 새벽은 확실히 백발 선승이 학이 되어 날아오를 때 떨어뜨리고 간 쪽빛 사리(舍利)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아주 까마득하게 젊었던 시절, 어느 암자에 잠시 머물면서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이 됐던 화두였다. 그 화두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