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반죽 재도전
오늘 밤 나는 거의 치즈 덩어리를 녹인 것처럼 처참하게 스러져간 지난번 밀가루 반죽에게 일단 명복을 빌고 넋을 기리기 위하여 그 영전에 밀가루 한 봉지를 새로 바치기로 했다. 프라이팬에서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안전 불감증으로 절명한 밀가루 반죽을 생각하면 다시 부침개에 도전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인지 몰랐다. 막상 밀가루를 앞에 놓고 보니 까닭 모를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그 두려움의 실체는, 지난번에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는 죄의식과 이제 또 실패하면 필경 상습범으로 몰려 마누라가 살아 있는 한, 다시는 내 손으로 부침개고 수제비고 직접 만들어 먹는 건 고사하고 우리 집에서 아예 그 메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상습범이었고, 그동안 마누라 모르게 뻘짓과 삽질을 해댔 것만 벌써 여러 차례였다. 하여, 이번만은 밀가루와 물 조절에 있어서 좀 더 과학적이고 좀 더 수학적인 자세로 임하겠다는 다짐을 양푼 앞에서 선서했다. 한 큰 술과 작은 술의 의미가 크게 마시는 술과 적게 마시는 술이 아니라는 것쯤 이미 파악한 나 자신이 약간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가루와 물에 필요한 큰 술의 수치를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대충 감을 잡았다. 항상 이 감(感)이 문제였지만 이번에는 왠지 자신이 있었다.
가루 종류의 한 큰 술은 어른 숟가락으로 한 번 떠서 좌우로 살살 흔들어 깎았을 때의 양이라고 했고, 액체 종류의 한 큰 술은 숟가락에 부어서 볼록한 정도의 양이라 했겠다. 그런데 좀 문제가 있었다. 밀가루는 그렇다 쳐도 물을 언제 그런 식으로 다 부을 것인가.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뚝배기에 물을 붓고 된장을 엷게 풀어 멸치를 넣고 나서 가스레인지에 뚝배기를 올려놓았다. 마누라도 반죽을 하기 전에 항상 그리했으니 나도 따라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뭔가 감이 좋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반죽 하기 위해 밀가루 한 큰 술, 물 한 큰 술을 번갈아 가며 양푼에 넣었다. 상당히 인내심을 요했다. 반죽은 손으로 해야 제맛이라는 마누라의 지론에 동승해 나는 팔을 걷어붇히고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요망한 것이 서두부터 많이 찐득거렸다. 찰져야 제맛인데.... 밀가루를 좀 더 붓자. 다시 열심히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찰진 게 아니라 터실 터실거리면서 밀가루가 온통 지방자치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음.... 큰 술로 할 게 아니라 이젠 감으로 물을 좀 더 붓고.... 그때 뚝배기가 넘쳐 흘렀다. 다급한 마음에 반죽으로 엉망이 된 손으로 행주를 들고 뚝배기를 들어냈다. 아 참, 아니지 그냥 불을 줄이면 될 텐데.... 머리하곤.... 불을 줄이고 뚝배기를 도로 올려놓곤 다시 반죽에 들어갔다.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감기 때문에 콧물까지 덜렁거렸다. 물을 좀 더 붓고 패대기치 듯 쳐댔다.
내 마음속에 김이 조금 오르더라도 참아야 했다. 패대기치 듯 쳐대는 행위는 사실 참는 것이었다. 처음보다 더 질덕거려 밀가루를 더 부었다. 다시 물을 붓고.... 역시 질덕거려 밀가루를 조금 더 넣는다. 다시 물붓고.... 도로 밀가루 넣고.... 또 붓고.... 남은 밀가루 왕창 털어넣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변한 나는 조금씩 우당탕거리기 시작했다. 맵싸한 국물을 생각하고 청량 고추를 썰어 넣을 때, 눈알로 본 것은 있어서 감자를 썰어 넣을 때
품격 있는 요리사의 도마질이 아니라 거의 검도에 가까운 칼질을 해댔다.
허연 밀가루 반죽이 칼에, 도마에, 싱크대에, 행주에, 밀가루 봉지에, 숟갈에, 국자에.... 묻었다. 뚝배기의 국물은 무슨 뼈다귀를 곪는 것도 아닌데 거의 졸아들고.... 바가지로 물을 퍼서 냅다 처넣었다. 피시시식~~ 사방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매캐한 냄새 최류탄이었다. 코를 찔렀다. 아아, 어째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후다닥 창문을 열고 바닥을 닦고 싱크대를 닦았다. 뚝배기를 비워버리고 허연 밀가루 자국을 없애려고 박박 문질러 설겆이를 했다. 애정없이 양푼 안에서 굳어 있는 밀가루 반죽.... 보기도 싫었지만, 그냥 버리기도 아까웠다.
젠장, 흙 설탕으로 호떡 아닌 호떡을 한 번 만들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