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계절에는 냄새가 있다

시인 김상훈 2009. 2. 26. 05:15

 

말하기가 때로는 침묵하기보다 어렵다. 계절의 언어는 그래서 소리가 없는 형(形)이고 색(色)인지 모른다. 더 기막힌 언어는 바로 냄새다. 이 역시 소리만 없을 뿐 침묵이라기보다는 말하기에 더 가깝다.

수유로 얼룩진 배냇저고리 냄새 같기도 한 봄 냄새는 어느 땐 마치 어린 계집아이의 비릿한 초경 냄새 같기도 하다. 뙤약볕 한 아름 머리에 이고 한약 냄새 폴폴 풍기는 여름 숲이, 여름을 보내면서 계절은 인간이 모르는 덧셈과 뺄셈을 모두 끝낸다. 분말가루처럼 더께로 쌓인 비포장도로의 먼지층이 가을을 재촉할 즈음, 가을이 언제냐 싶게 곧잘 겨울로 환치기 당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송장 메뚜기의 송장냄새와 제 할 일 끝내고 탈곡기에서 이탈하는 볏단 냄새를 가을 냄새라고 우긴다 한들, 어이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볏단은 끈질기다. 고생대의 화석처럼 얼음 속에서 간혹 투명하게 살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서리 낀 주황의 겨울 하늘만큼이나 냉랭한 냄새가 난다. 그래서 겨울 냄새는 다른 거 없다. 군불 지핀 따뜻한 아랫목에 있다가 불쑥 창문을 열었을 때 느닷없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날카로운 공기에 콧구멍 속이 쨍하다 못해 흘금 눈물이 다 나는 것, 그것이 바로 겨울 냄새다. 계절에는 확실히 냄새가 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