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서랍

[스크랩] 이강백의 희곡[느낌, 극락 같은]

시인 김상훈 2008. 9. 4. 20:34

[등장 인물]
함묘진
함이정
동연
서연
조숭인

시간 :현대

장소 :불상제작가 함묘진의 집, 마당, 들판

-공연을 위한 작가 노트

이 희곡은 여러 장면들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막 또는 장 표시는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흐름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어떤 장면은 그 시작 부분이 앞장 면의 끝부분과 겹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희곡을 공연할 때 바로 그러한 연결과 겹침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함묘진의 연령은 60대이다. 불상 제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대단히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불상 만드는 솜씨가 예전만 못하고, 건강했던 육신마저 하반신 마비 증세에 시달리는 것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다.
동연과 서연은 함묘진의 제자로서 들 다 30대 초반이다. 동연은 스승보다 더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얼굴은 윤곽이 뚜렷하고 체격은 단단한 근육질형이다. 서연은 동연에 비해 평범한 모습이지만 사려 깊은 심성을 갖고 있다.
함이정은 함묘진의 무남독녀이다. 그녀는 20대 중반이며, 우아한 용모를 가진 매력적인 여성이다. 조숭인은 동연과 함이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출생 이전부터 이 연극에 등장해서 유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20대 청년의 모습으로 그 과정 전체를 연기한다. 물론 다른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십 년의 시간 경과를 각자 정해진 연령 상태대로 연기해야 한다.
무대장치, 소도구, 소품들은 이 희곡의 여러 장면들을 하나로 합쳐 놓은 복합 개념으로 만들기를 바란다. 예를 들자면 각 장면마다 필요한 소도구와 소품들을 별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소도구 및 소품들을 한꺼번에 배열시켜 놓고 사용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형태의 불상들, 피아노, 바퀴 달린 이동식 식탁, 십일면관세음보살 탱화, 새벽을 알리는 나무로 깎아 만든 장닭들--- 이러한 것들은 무대의 삼면의 벽을 차지하고 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으며, 바닥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배열에 고려할 점은 기능성뿐만 아니라 장식성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희곡의 공연에는 조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장면에 필수적인 소도구와 소품은 조명으로 그것만을 비춰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함묘진의 집, 마당, 들판 등 한 무대에서의 각기 다른 공간 표현도 조명이 맡아 줄 역할이다.

(막이 오른다. 깊은 밤. 들판의 천막. 좌우 양쪽에 놓인 촛대에서 타오르는 촛불. 촛대 뒤에는 서연의 시신이 안치된 검소한 초분이 놓여 있다. 소복을 입은 함이정, 평온한 표정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다. 바람소리, 풀벌레 울음소리--- 조숭인이 들어온다.)

[조숭인] 저예요, 어머니.

[함이정] 어서 오렴!

[조숭인] (관 앞으로 가서 두 번 절한다)

[함이정] 내 느낌이 맞는구나. 오늘밤 네가 올 것 같더라.

[조숭인]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어요. 장례비용에 쓰시라고--- (조의금 봉투를 꺼내 함이정에게 내민다)

[함이정]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의금 봉투를 받는다.) 고맙다. 하지만 장례는 걱정 없어. 그 분이 여기 들판에 뿌려 달랬어. (무엇인가 재미있다는 듯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어제는 송덕사 스님들이 오셨지. 우습더라. 그 분이 살아 계실 땐 미치광이라고 싫어하던 스님들이, 어찌나 열심히 목탁을 치시는지 그 분을 멀리 멀리 쫓아내려는 것 같지 뭐냐---

[조숭인] (함이정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묻는다.) 어머닌 행복하세요?

[함이정] 왜--- ?

[조숭인] 슬픈 얼굴이 아니어서요.

[함이정] 그래, 난 행복해.

[조숭인] 저는 괴롭습니다.

[함이정] 아직도 괴로워?

[조숭인] 네.

[함이정] 저런, 안 됐구나---

[조숭인] 제 마음속엔 여전히 두 분의 아버지가 다투고 있거든요. 두 분 아버지의 다툼 때문에 저는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죠.

[함이정] 두분 싸움은 끝났어. 이젠 극락이 됐다.

[조숭인] 어머니가 부럽군요.

[함이정] 너한테도 그런 때가 올 거야. 네 속에서 다투는 두 분의 싸움이 끝나고 극락이 되는---

[조숭인] 아버지는 지금도 어머니를 용서 안 해요. (무릎걸음으로 목관에 다가가서 어루만진다.) 이분을 만나 뵙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그토록 미워하시던 분. 이제는 살아 계시지 않으니---

[페이지] 003

[함이정] 그 분의 느낌은 살아 있어

[조숭인] 어머니의 느낌은--- 기억 같은 것인 가요?

[함이정] 죽음이란 그 분의 모양은 빼앗아 갈 수 있어도, 그 분의 느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느낌은--- 넌 느낌이 기억이냐고 묻는다마는--- 기억은 시간이 지난 다음엔 희미하게 사라져 가. 하지만, 저기 들판의 나무를 봐도 그 분이 느껴지고--- 흐르는 물, 뒹구는 돌, 들려 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도 난 그분을 느껴.

[조승인] 어머닌 그 분을 사랑하셨죠. 그래서 돌아가신 후에도 그 분의 느낌이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는 것 같군요.

[함이정] 난 두 분 모두를 사랑했어.

[조숭인] 그건 알아요, 어머니.

[함이정] 나는 너도 사랑했다.

[조숭인] (슬며시 웃는 얼굴이 되며) 안다니까요. (함이정 옆으로 다가온다.) 제가 태어나기 전, 그 때 두 분의 관계는 어땠었죠?

[함이정] 두 분 다 우리 집에 살면서, 아버님한테 불상 제작을 배우는 제자들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스승인 아버님이 불상 제작장에 가보니까 두 제자들이 자릴 비우고 없었어. 몹시 화가 난 아버님은 집안으로 들어와 제자들의 이름을 부르셨지. "동연아! 서연아!" 아버님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 울리는지, 천리 밖까지 들릴 것 같더라.

(조명, 밝게 변화한다. 무대 한가운데 내려 있던 막이 올라가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함묘진의 집. 함묘진이 성난 모습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면서 등장한다. 함이정과 조승인은 서연의 관, 촛대, 향로 등을 옆으로 치운다.)

[함묘진] 동연아! 서연아! 어디 있느냐?

[함이정] 여긴 없어요, 아버지.

[함묘진] 여기 집안에도 없다--- ?

[함이정] 내가 나가서 찾아올까요?

[함묘진] 넌 가만있거라. (다시 외쳐 부른다) 동연아! 서연아!

[조숭인] 할아버지 목청은 왜 저렇게 커요?

[함이정] 귀머거리도 들을 정도야, 그지?

(동연과 서연, 등장한다. 그들은 당황한 모습으로 함묘진 앞에 선다.)

[페이지] 004

[동연,서연] 부르셨습니까?

[함묘진] 작업장엔 너희들이 없더구나!

[동연] 죄송합니다. 잠깐 밖에 나가 있었습니다.

[함묘진] 밖에는 왜?

[동연] 말다툼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달라서요.

[함묘진] 말다툼?

[동연] 네.

[함묘진] 서연아, 네가 다툰 이유를 말해 봐라.

[서연] 송구스럽습니다---

[함묘진] 너흰 생각도 행동도 똑같았다. 그런 너희들이 말다툼을 하다니, 도대체 다르다면 뭐가 달랐더냐?

[서연] 동연은 부처의 모습을 만들면, 그 모습 속에 부처의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함묘진] 그런데, 너는?

[서연] 그런데 저는--- 부처의 모습을 만들어도, 부처의 마음이 그 안에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했습니다.

[동연] 사부님, 서연을 꾸짖어 주십시오. 서연은 쓸데없는 주장으로 저를 괴롭힙니다.

[함묘진] 너희 둘 다 만들던 불상을 가져오라!

(동연과 서연, 불상을 가져오려고 나간다. 함이정이 함묘진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상복을 벗고, 처녀 시절의 채색한 옷을 입고 있다.)

[함이정] 아버지, 부탁이에요.

[함묘진] 뭐냐?

[함이정] 서연 오빠를 너무 꾸짖지 마세요.

[함묘진]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함이정] 요즘 뭔가 큰 고민이 있나 봐요. 동연 오빠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데, 서연 오빠는 그렇지 못하거든요.

[함묘진] 어찌 넌 그 모양이냐? 다 큰 처녀가. 오빠 동생하며 함께 노는 시절은 지났어. 내 말 알아듣겠냐?

[함이정] 그럼, 지금은 어떤 시절이에요.

[함묘진] 지금은 오빠들이 남자가 되고 동생이 여자가 되는 때다. 동연이와 서연이를 봐라. 그 둘이 말다툼을 한다는 것은 남자가 되었다는 증거야. 그들은 이제 너를 두고 싸울 거다.

[페이지] 005

(동연과 서연, 각자가 만든 목조 불상을 들고 온다.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미륵보살 반가상이다. )

[함묘진] 둘다 참 잘 만들었구나!

[동연] 미륵보살 반가상입니다.

[함묘진] 그렇다. 미륵보살 반가상은 불상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불상이다. 동연아, 네가 먼저 이 불상의 특징에 대해 말해 봐라.

[동연] 사부님은 저희에게. 미륵보살 반가상의 특징은 완벽한 균형미에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선 전체 무게를 지탱하는 하반신을 만들 때, 오른쪽 다리는 이렇게 수평이 되도록 뉘이고, 왼쪽 다린 아래로 수직이 되도록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형태가, 수직과 수평의 절묘한 균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함묘진] 아주 명확한 대답이다. 서연아, 다음은 상반신에 대해 말하여라!

[서연] 미륵보살 반가상의 상반신은 두 손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오른손은 또 하나의 상승하는 수직이 되도록 얼굴을 향하게 들어 올려야 하고, 왼손은 그 반대로 하강하듯이 뉘인 다리의 발목을 향해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반신의 수직과 수평, 상반신의 상승과 하강이 서로 어우러져 불상 전체가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게 됩니다.

[함묘진] 너의 대답 역시 명확하다! 동연아, 서연아, 너희들은 벌써 완벽한 형태를 터득하였구나!

[동연] 감사합니다, 사부님.

[함이정] 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하셔. 그런데 오늘은 두 오빠를 모두 칭찬하시는구나.

[조숭인] 하지만 두 분의 반응이 다른데요? 동연이란 분은 칭찬 듣고 좋아하는데, 서연이란 분은 침통한 표정이에요.

[함묘진] 서연아.

[서연] 예, 사부님.

[함묘진] 어째서 너는 기뻐하질 않느냐?

[서연] (침묵한다.)

[동연] (서연을 팔꿈치로 툭 치며) 어서 솔직히 말씀드려.

[서연]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만든 불상은 그저 부처의 모습일 뿐, 부처의 마음은 아닙니다.

[함묘진] 그러니까 네 말은 뭐냐? 네가 만든 불상에는 부처의 마음이 없다, 그 뜻이냐?

[서연] 네. 제 고민은 그것입니다.

[동연] 서연을 야단쳐 주십시오, 사부님. 부처의 모습 속에 부처의 마음이 없다

[페이지] 006

니,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입니까?

[함묘진] (손을 들어 동연의 항의를 제지시키며) 가만 있거라, 너는. (서연에게) 네 말을 좀 더 들어보자. 여기 두 개의 불상이 있다. 하나는 네가 만든 것, 다른 하나는 동연이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너는 네가 만든 불상에 대해서 말하기를, 부처의 형태일 뿐 부처의 마음은 없다고 했다. 그 까닭이 뭐냐?

[서연] 저는 부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 마음을 아직 알지 못한 채 형태만 만들었으니, 그건 무엇일까요---

[함묘진] 그렇다면 동연의 불상에 대해서는? 동연이가 만든 불상에는 부처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서연] (침묵한다.)

[함묘진] 대답하라!

[서연] 동연의 불상은 감탄할 만큼 잘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함묘진] 그러니까 동연의 불상 역시 형태뿐이다, 그것이냐?

[서연] 네. 부처의 마음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동연] 부처의 마음이 없다, 내가 만든 불상에? 여봐, 서연이!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 (함묘진에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부처의 형태를 미숙하게 만들면 그 속엔 부처의 마음이 없겠지요. 그러나 부처의 형태를 완벽하게 만들면, 반드시 그 완벽한 형태 속에는 부처의 마음도 있기 마련입니다. 서연은 미숙합니다. 아직 만드는 솜씨가 미숙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동료인 저를 괴롭히며, 스승인 사부님의 심기마저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서연을 꾸짖어 주십시오. 완벽한 솜씨를 터득하는데 전력하라고, 열심히 공부나 하도록 야단쳐 주십시오!

[함묘진] 나는 너희에게 불상 제작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 세상에 나만큼 불상의 형태에 대해 잘 아는 자는 없다! 하지만 마음은 모르겠다. 서연아, 부처의 마음을 알려거든 다른 자에게 물어라! (함묘진, 휠체어 바퀴를 굴려 나간다. 동연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서연을 바라보며 나간다)

[조숭인] 여러 가지 불상들이 참 많군요.

[함이정] 각기 형태에 따라 이름도 다르단다. 가르쳐 줄까?

[조숭인] 아뇨.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겠죠. 이건 서연선생이 내게 가르쳐 준 느낌 아닐까요?

[함이정] 오늘은 스님들이 오시는 날이야. 보현사 주지 스님, 월계사 방장 스님,

[페이지] 007

그리고 백운사 스님들도 오셔.

[조숭인] 왜 오시죠?

[함이정] 완성된 불상들을 보시려고, 절을 새로 짓거나 늘려 지으면 불상이 필요하잖아. 스님들은 까다로워. 워낙 보는 눈이 높으시니까 웬만한 불상은 쳐다보지도 않으셔. 하지만 마음에 들면 후한 값을 주고 사 가시지. 절 한 채 값보다 더 비싼 불상도 있고, 무척 잘 만든 불상은 절 열 채 값보다 더 넘어.

[조숭인] 절 열 채 값이라--- 굉장하군요! (다시 한 번 불상들을 둘러보며) 저는 그 정도인 줄을 몰랐어요. (불상들 중에 있는 미륵보살 반가상을 가리키며) 여기 보세요, 어머니. 아주 잘 만들었다고 칭찬 받은 불상이 있어요.

[함이정] 그래, 그건 동연 오빠가 만든 거야.

[조숭인] 또 하나는 어디 있죠?

[함이정] 서연 오빤 내 놓지 않았어.

[조숭인] 스승의 불상들 속에 제자가 만든걸 함께 놓다니--- 그것도 구석이 아니고, 한 가운데 놨어요.

[함이정] 가운데가 제일 돋보이거든. 아버진 동연 오빠 불상을 스님들께 선보일 작정이셔. 스님들은 고지식해서, 절대로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고 생각안 해. 그래서 그런 생각을 바꾸려고, 제자의 잘 만든 작품을 스승의 작품들과 함께 놓는 거지.

[조숭인] 잠깐만요. 누군가 우리룰 훔쳐보는 것 같아요.

[함이정] 누가 우리를--- ?

[조숭인]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함이정] 그렇구나. 저기 살구나무 뒤에 동연 오빠가 있어.

[조숭인] 이 쪽으로 오고 있군요.

(조숭인, 불상들 사이에 앉더니 불상과 같은 흉내를 낸다. 동연, 함이정에게 다가온다.)

[동연] 궁금해서 왔어. 역시 눈에 띌 곳에 내 미륵보살 반가상을 두었군.

[함이정]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죠.

[동연] 두고 봐. 내 불상은 반드시 팔릴 거야. 이왕이면 보현사 주지스님이 사가시는게 좋겠어. 보현사는 돈이 많거든. 월계사, 백운사는 가난해. 첫 시작부터 절 한 채 값은 받아야지, 그 아래로 내려받고 싶진 않아.

[함이정] 나도 동연 오빠 소원대로 됐으면 좋겠어요.

[동연] 그리고 오늘은, 내 불상만 팔렸으면 좋겠어. 마치 구색을 맞추듯이 이것저것 사 가면서 내 것도 끼워 가는 건 싫다구. (마당에 놓여 있는 다른

[페이지] 008

불상들을 둘러보며) 이런 말을 하는 건 안 됐지만, 요즘 사부님 불상들은 뭔가 미흡해. 예전만큼 정교하지 않고, 완벽하지도 않아. 이젠 한계야. 은퇴하실 때가 된 거라구. 내 진짜 소원이 뭔지 알아? 사부님의 작업장을 물려받고, 너와 결혼하는 거야.

[함이정] 결혼을요--- ?

[동연] 왜 그렇게 놀래?

[함이정] 오빠하고 결혼이라니, 당황해서요---

[동연] 대답해. 나하고 결혼하는 게 싫어?

[함이정] 글쎄요---

[동연] (미륵보살반가상을 가리키며) 이걸 봐. 다른 불상들이 남성적이라면, 미륵보살 반가상은 여성적이야. 갸름한 얼굴, 도톰한 가슴, 잘록한 허리--- 내가 너를 생각하며 만든 거야.

[조숭인] 가만 듣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입에 손을 모으고 외친다) 저기, 스님들이 와요! 돈 많은 보현사 스님도 오시고, 가난한 월계사, 백운사 스님들도 오세요!

(함이정, 부끄러운 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달아난다. 동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무대조명, 전환한다. 함묘진의 집. 저녁 무렵. 한 줄기 빛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함묘진을 비춘다. 행주치마를 두른 함이정이 바퀴 달린 이동식 식탁에 음식을 차려 운반해 온다)

[함묘진] 식욕이 없다. 술이나 다오.

[함이정] 저녁 식사를 하셔야죠.

[함묘진] 술을 줘.

[함이정]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 함묘진이 입에 대 주며) 아버지, 조금 잡수시는 시늉이라도 하세요. 그럼 술을 드릴께요.

[함묘진] (억지로 받아 삼키며) 꼭 모래 씹는 맛이다---

[함이정] 스님들은 어떤 불상을 택하셨어요?

[함묘진] 동연의 미륵보살 반가상.

[함이정] 그렇군요. 아버지가 만든 불상은요?

[함묘진] 내가 만든 건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역시 보현사 주지스님 눈이 높더구나. 대번에 동연이가 만든 불상을 가리키면서, 군계일학 같은 명품이라 극찬했다. 그리고는 절 한 채 짓는 값을 내고 모셔 갔어.

[함이정] 동연 오빠는 기쁘겠어요.

[함묘진] 내가 더 기쁘더라. 스승이란 그런 거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제자를 키워 놓는 것, 그게 더 기쁘고 보람있는 거야. (손을 내저어 숟가락을 물리

[페이지] 009

치며) 이젠 먹기 싫다. 술을 다오.

[함이정] 아버지---

[함묘진] 왜?

[함이정] 난 알아요.

[함묘진] 뭘 알아?

[함이정] 동연 오빠는 아버지가 예전 같지 않대요. 요즘 만드신 불상들을 보면--- 이젠 은퇴하실 때가 왼 거래요. 그러면서 동연 오빤 자기가 아버지의 불상 제작장도 물려받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군요.

[함묘진] 동연이 그 놈---

[함이정] 아버지,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함묘진] 아니야, 넌 해야 돼. 난 늙고 병들었어. 내 가업을 이을 후계자도 정해야 하고, 나 죽기 전, 네가 낳은 손자도 보고 싶다. 동연이란 놈, 괘씸하지만 네 남편감이야. 그 놈은 야망도 있고, 능력도 있어. (휠체어 바퀴를 굴려서 뒤로 후진하며) 술을 가져 와. 오늘밤은 잔뜩 취해야 잠들 수 있겠구나.

(함이정, 운반용 식탁을 밀며 나간다. 무대조명, 변화한다. 불상제작장, 동연이 등장하여 바닥에 커다란 두루마리를 펼친다.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이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동연은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각 부위별 치수를 자로 치밀하게 재면서, 그 평면의 형태를 입체적인 형태로 만드는 방법을 궁리한다. 서연, 들어온다.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방랑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깨를 둘러 맨 배낭을 내려놓고, 동연의 작업을 바라보더니, 자신이 왔음을 알리려는 듯 헛기침을 한다.)

[서연] 흠--- 흠---

[동연] (일부러 반응하지 않는다.)

[서연] 나, 돌아왔네.

[동연] (힐끗 바라보더니 작업을 계속하면서) 갈 때는 아무 말도 없이 가더니, 와서는 무슨 염치로 말을 하는가?

[서연] 미안하네. 그저 마음 답답해서 바람 좀 쏘이고 왔지.

[동연] 그저 바람 쏘이고 왔다, 참 한가한 사람이군!

[서연] 그런데 자넨 뭘 그리 열심히 하는가?

[동연] 난 몹시 바쁘네!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주문 받았어. 이번엔 목각이 아니야. 황금과 구리를 섞어 만드는 금동상일세.

[서연] 축하하네, 동연이.

[동연] 지난 번 내가 만든 미륵보살상이 팔렸거든. 절 한 채 값 받았네. 보현

[페이지] 010

사 주지스님이 한 눈에 보고 반하셨지. 그러더니만 내 실력을 인정하시고는 관세음보살상을 의뢰하셨어. 두고 보게. 이 일만 잘 되면 난 일약 유명해질 거야.

[서연] 어련하겠는가. 자넨 반드시 유명해질 걸세.

[동연] 잘 듣게. 사부님께선 모든 걸 나에게 넘겨주실 생각이셔. 자네와 나, 둘을 놓고 저울질하시다가 결국은 나를 후계자로 택하셨지. 그렇다고 원망은 말아. 우린 둘 다 공평하게 똑같은 기회가 있었어. 하지만 난 열심히 노력해서 그 기회를 잡았고, 자넨 태만하여 그 기회를 놓쳤다구. (동연, 잠시 작업을 멈추고 서연을 바라본다. 서연은 담담한 표정이다.)

[서연] 내가 다녀오는 운장산은 참 좋더군.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곧게 뻗은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뤘어. 그 숲 속의 호젓한 길로 걸어 올라가는 맛은 가히 일품이었네. 동연이, 어떤가? 나와 함께 가보지 않을 텐가? 이런 답답한 작업장에서 부처님 화상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람 마음이 옹졸해져. 운장산에 올라서면 사방팔방이 툭 터졌네. 한 눈에 지리산의 웅장한 봉우리들이 보이고, 저 멀리 아스라히 무등산, 그리고 두 귀가 봉긋한 마이산도 보여. 그런 다음 계곡을 따라 산을 내려오면--- 비석 바위, 다불바위, 보살암 등 십리에 걸쳐 온갖 바윗돌이 늘어서 있는데, 사람이 만든 불상보다 진짜 부처님을 닮으셨네.

[동연] 그래서? 그 바윗돌이 내가 만든 불상보다 낫다 그건가?

[서연] 여보게, 동연이.

[동연] 왜?

[서연] 자네가 본뜨려는 부처님 형상은 누가 언제 그렸는지 몰라도 흔히 있는 것을 베껴 놓은 것일세. 그런데 자네는 그 형상을 또 다시 베껴 만들 작정이군. 자넨 의심도 없는가? 심사숙고해 보게. 그런 형상이 진짜 부처님은 아닐세.

[동연] 나에겐 전혀 의심이 없네.

[서연] 의심이 없다니?

[동연] 무엇 때문에 의심을 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가?

[서연] 음---

[동연] 공부를 하게, 괜히 의심 말고! (바닥에 펼쳐 놓은 두루마리 탱화를 가리키며) 자넨 얼마나 형상 공부를 했는가? 이 십일면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에는 열한개의 얼굴들이 있는데, 그 얼굴 하나 하나를 살펴나 봤었는가? 귀걸이, 목걸이, 손에 든 보병과 기현화란 꽃의 형태를 꼼꼼히 연구했었

[페이지] 011

는가? 자네처럼 게으른 자들은 공부는 안 하고, 아무 의미 없다 의심만 하지!---

[서연] 자넨 정말. 열심히 공부했네. 그렇다면 그 형태 속에 부처님 마음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게.

[동연] 또 괜한 트집이군!

[서연] 내가 우둔해서 그런가--- 운장산 가는 길엔 절도 많더군. 이런 절도 구경하고 저런 절도 구경하면서 온갖 불상들을 봤었네만.. 부처님 마음은 못 보았네.

[동연] 듣기 싫네, 그런 궤변은!

[서연] 내 가슴이 답답할 뿐이네, 나도 한때는 자네처럼 부처의 형상을 만들었네 만, 부처의 마음은 느낄 수가 없었네. 정말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함묘진, 휠체어 바퀴를 굴리면서 들어온다. 그는 서연을 보자 반가워한다.)

[함묘진] 서연이가 왔구나! 서연이가 왔어!

[서연] (일어나서 공손히 절을 하며) 네, 사부님.

[함묘진] 도대체 너는 어딜 갔었더냐?

[서연] 전라도의 운장산에 갔었습니다.

[함묘진] 운장산이라--- 전라도는 명산대찰이 많은 곳이지. 아무튼 돌아와서 반갑구나. 난 네가 부처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고민하다가 나갔기에 머리 깎고 중 되는 줄 알았지.

[서연] 저도 그럴까 했었습니다만---

[함묘진] 그랬는데?

[서연] 저에겐 승려의 자질이 없습니다. 더구나 까다로운 계율도 지키지 못 할 테고---

[동연] 알긴 아는군!

[함묘진] 그럼 그 동안 뭘 했었느냐?

[동연] 서연은 운장산 계곡에서 바윗돌만 봤다고 합니다.

[함묘진] 바윗돌만 봤다니?

[서연] 저는--- 불상 제작은 포기했습니다---

[함묘진] 형태는 포기해도 마음은 포기하지 말아라. 요즘 내 생각이 달라진다. 부처의 형태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만이 부처에게 도달하는 길이라고 여겼더니, 그게 아니야.

[동연]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페이지] 012

[함묘진] 무슨 말이기는--- 부처의 형태에 치중하면 도리어 부처의 본성과는 멀어질 수 있다, 그런 말이지.

[동연] 평소의 사부님 말씀 같지 않으십니다.

[함묘진] (동연을 지긋이 바라본다) 너는 분명히,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 앞으로 네가 만든 불상들은 내가 만든 불상보다 더 칭찬을 받을 거다. 그러나 동연아, 네가 더 이름을 얻고 돈은 더 벌겠다만--- 자만하지 말아라. 부처의 모습을 잘 만든다고 해서 부처의 마음마저 잘 만드는 건 아니다. ( 함묘진, 휠체어의 방향을 돌려서 나간다)

[동연] 저 어른이 이제는 나를 시기하시는군!

[서연] 사부님이 자네를--- ?

[동연] 날 시기하는 거야. 자네가 집에 없을 때는 모든 걸 나에게 넘겨주실 듯이 그러더니만, 자네가 나타나니까 교묘하게 태도를 바꿔 자네 편을 드셨어!

[서연] 자넨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은가?

[동연] 기분 좋을 리는 없지.

[서연] (바닥에 내려놓았던 배낭을 둘러맨다.) 그럼 잘 있게.

[동연] 또 어딜 가려고--- ?

[서연] 몇 달쯤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오겠네.

[동연] 정말 팔자도 좋군! 몇 달 아니라 몇 년이라도 실컷 떠돌아다니게나!

(서연, 나간다. 동연은 바닥에 펼쳐 놓았던 십일면관세음보살상 두루마리를 둘둘 말아 든다. 무대조명, 암전 한다. 함이정의 방, 혼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쓸쓸한 느낌의 음악이다. 조숭인 들어온다.)

[함이정] 그 때가 참 즐거웠는데--- 내가 피아노를 치고, 동연 오빠랑 서연 오빠랑 함께 노래 부르던--- 지금은 왜 이렇게 쓸쓸하게 된는지 몰라---

[조숭인] 제가 대신 불러 드릴까요?

(방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함이정과 조숭인, 긴장한다.)

[함이정] 누구시죠?

[동연] (소리) 나야, 나. 들어가도 돼?

[조숭인]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세요. 지금은 밤이잖아요.

[페이지] 013

[함이정] 지금은 밤인데요?

[동연] (문을 두드리며) 오늘밤 꼭 할 말이 있어.

[함이정] 들어오세요, 그럼---

(동연, 함이정의 방안으로 들어온다.)

[동연] 서연이가 다녀갔어.

[함이정] 알아요.

[동연] 안다고?

[함이정] 네.

[동연] 서연이를 어떻게 생각해?

[조숭인] 조심하세요. 표정이 심각해요.

[함이정] 어떻게 생각하다뇨?

[조숭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좋으냐 나쁘냐, 그런 질문인가 봐요.

[함이정] 서연 오빠가 좋으냐, 나쁘냐, 그런 질문이에요?

[동연] 그래. 나하고 비교해 보면 어때?

[함이정] 난 동연 오빠도 좋고, 서연 오빠도 좋아요.

[동연] 그건 대답이 아냐!

[함이정] 난 둘다 좋은 걸요.

[동연] 둘 다 좋다니, 구분도 못해?

[조숭인] 몹시 화났어요. 심한 모욕을 당한 것처럼.

[동연] 서연은 나쁜 놈이야! 얼간이, 게으름뱅이, 허풍만 떠는 건달이라구!

[조숭인] 하품을 하세요, 어머니---

[함이정] 하품을?

[조숭인] 이잰 졸려서 자고 싶다는 하품을요.

[함이정]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한다.)

[동연] 내 말이 졸립다 그거로군!

[함이정] 미안해요, 동연오빠. 내일 아침에 말하면 안 될까요.

[동연] 난 지금 중대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야! 서연이와 내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말하고 있는 거라구! 이 세상이란 뭐냐? 눈에 보이는 형태로 가득 차 있는 곳이야!

[조숭인] 왜 갑자기 세상을 들먹이는지 모르겠네---

[동연] 나는 형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서연이는 그걸 무시해!

[조숭인] 어머니, 하품을 한 번 더 하시죠.

[함이정] (하품을 한다)

[페이지] 014

[동연] 사부님의 병환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잖아. 하반신의 마비 증세가 상반신까지 올라오고 있거든. 벌써 증세가 나빠. 두뇌가 정상이 아냐. 예전에는 결코 안 하던 짓을 하시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말씀마저 변덕스러워. (함이정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이만큼 말했으니 알아듣겠지?

[조숭인] 어깨는 놓고 말하라고 하세요.

[함이정] 놓아줘요, 어깨는요.

[동연] (더욱 강하게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내가 말할 때 두 번이나 하품을 했어! 두 번이나!

[함이정] 이젠 안 할 테니 놓아줘요.

[동연] 놓아주면 잠이나 자겠지!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태평하게 잠을 잘테지! (함이정을 쓰러뜨려 바닥에 눕히고는 올라탄다) 결정은 내가 하겠어! 여자는 이성적인 판단력이 없거든.

[조숭인] 점잖게 행동하라고 소리질러요!

[함이정] 점잖게 행동하세요. 아버지를 부를 거예요!

[동연] (함이정의 옷을 강제로 벗긴다) 불러 봐! 오늘밤도 술에 취해서 듣지 못할걸! 사랑해! 내가 모든 걸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 주겠어.

[조숭인] 어머니, 발악을 하세요! 목청껏 소리지르고, 손톱으로 할퀴고, 입으로 물어뜯어요!

[함이정]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상하구나--- . 이상해---

[조숭인] 뭐가 이상해요? 어서 할퀴고 물어뜯어요.!

[함이정] 난 온 몸이 녹아 버리는 것 같아---

[조숭인] 사랑한다는 말에, 책임진다는 말에 녹아 버린 거예요?

[함이정] 헉헉 숨이 막혀---

[조숭인] 어머니, 이러시면 안돼요! 사랑이 좋고, 책임이 좋아도, 이런 형식은 안 좋아요. 안 좋은 거라구요!

(무대조명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격정적인 호흡 소리가 들린다. 사이. 무대 차츰차츰 밝아진다. 함이정이 임신복을 입고 있다. 조숭인은 함이정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웅크린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는 몹시 울적한 모습이다. )

[조숭인] 어머닌 행복해요?

[함이정] 그럼 행복하지!

[조숭인] 난 행복하지 않아요.

[페이지] 015

[함이정] 안 들려. 다시 말해 봐.

[조숭인] 행복하지 않다구요!

(함이정, 임신하여 볼록해진 배를 얼싸안고 조숭인에게 다가온다)

[함이정] 나는 좋구나. 너를 임신한 게 너무 좋아. 볼록해진 배를 어루만지면 네가 내 뱃속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져.

[조숭인] 난 잔뜩 움츠리고 있는 걸요. 불안해요---

[함이정] 뭐가 불안해?

[조숭인] 형식이 나빠요. 형식이 나쁘면 내용도 좋을 수 없죠.

[함이정] 넌 걱정 말아.

[조숭인] 내가 태어나는 형식이 영 마음에 안 들어요. 아버지가 나를 강제로 임신시키다니--- . 할아버진 뭐라고 하시던가요?

[함이정] 응--- 무척 좋아하셨어.

[조숭인] 정말이에요?

[함이정] 정말이잖구. 참 잘된 일이라고 하시더라.

[함이정] 넌 뭔가 기분이 나쁘구나?

[조숭인] (침묵한다)

[함이정] 왜? 넌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싫어?

[조숭인] 싫어요.

[함이정] 왜 싫은 거야?

[조숭인] 난 느낌이었던 때가 좋았어요. 어떤 형태가 된다는 건 생각도 안 했고---

[함이정] 엄마 아빠가 결혼식을 치르면 네 기분도 좋아질 거다. 날짜는 이미 정해 놨어. 다음 달 초사흘이야. 그 날은 동연 오빠, 아니 너의 아빠가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완성해서 공개하는 날이기도 하지. 열한개의 얼굴들이 달린 굉장한 불상--- 벌써 온 세상에 소문이 퍼졌어. 굉장한 불상도 보고 결혼식도 볼 겸, 그 날 보현사는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룰게 틀림없어.

[조숭인] 어머니는 지금 임신 팔개월 째예요. 사람들이 어머니의 배를 보고 얼마나 웃어댈까--- 뱃속의 나는 생각만 해도 기가 질려요. 아버지께 말씀하세요. 불상의 완성을 늦추던가, 결혼식을 늦추도록요.

[함이정]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나도 불룩한 배가 걱정된다만--- 그렇지, 헝겊띠로 꼭꼭 졸라매면, 어느 정도는 괜찮아 보일 거다.

[조숭인] 저를 꼭꼭 졸라매요?

[조숭인] 오, 맙소사---

[함이정] (헝겊 띠로 겹겹이 배를 둘러싸며)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답답해도 네가

[페이지] 016

참아라.

[조숭인] 좋아요, 어머니! 그렇다면 저한테도 생각이 있어요! (조숭인, 웅크린 몸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함이정은 해산의 진통을 느낀다)

[함이정] 너, 왜 이러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조숭인] 저는 지금 태어날 거예요!

[함이정] 참아! 참으라니까! 두 달이나 먼저 태어나면 위험해!

[조숭인] 아뇨! 전 태어나요! (조숭인, 더욱 더 빠르게 굴러다닌다. 함이정은 묶었던 헝겊 띠를 다급하게 풀어헤치더니, 불룩한 배를 부둥켜안고 숨가쁘게 비명을 지른다. 무대조명, 암전 한다. 무대 한구석이 밝아진다.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가 악을 쓰듯 울어댄다. 함묘진이 휠체어 바퀴를 굴리면서 어린 아기에게 다가온다. 그는 우는 아기를 달래려고 딸랑딸랑 소리나는 장난감을 흔든다. 서연, 들어온다.)

[서연] 사부님, 서연이가 왔습니다.

[함묘진] (짜증난 태도로 장난감을 흔든다) 울지마라! 울지마!

[서연] 제가 왔어요.

[함묘진] 제발 좀 울지 말라니까!

[서연] 사부님!

[함묘진] 어--- 누구냐?

[서연] (허리 굽혀 절한다) 오랜만에 찾아 뵙습니다.

[함묘진] 서연이--- 서연이구나---

[서연] 네.

[함묘진] 동연이와 내 딸은 보현사에 갔어.

[서연] 보현사에 무슨 일루요?

[함묘진] 결혼하는 날이야, 바로 오늘이.

[서연] 결혼--- 정말입니까?

[함묘진] (강보에 싸인 어린 아기를 가리키며) 믿지 못하겠거든 이리 와서 봐. 이 놈이 내 손자야.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했어. 임신 팔 개월만에 팔삭둥이로 태어나서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제 에미가 온갖 정성을 다해 살려 놨지.

[서연] (가까이 다가와서 아기를 바라본다) 아주 총명해 보입니다.

[페이지] 017

[함묘진] (울어대는 어린 아기에게 소리나는 장난감을 흔들며) 울지마! 제발 울음 좀 그쳐!

[서연] 제가 달래 볼까요?

(서연, 한 손으로는 어린 아기를 가슴에 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장난감을 주워 들고 흔든다. 어린 아기는 더욱 발악적으로 울어댄다. 서연은 그 이유를 알았다는 듯 장난감 흔들기를 멈춘다.)

[서연] 알았다, 아가야. 소리를 멈출 테니, 너도 울음 그치렴.

[함묘진] 어어, 이 놈이 뚝 그쳤어!

[서연] 이 아인 소리에 민감하군요.

[함묘진] 어쩐지--- 이것만 흔들면 더 울어댔어.

[서연] 아이 이름은 지으셨어요?

[함묘진] 제 어미가 미리 지어 놓은 이름이 있어. 숭인이야. 제 애비 성이 조씨니까 조숭인이지. (아기를 바라보며) 숭인아---

[서연] (품안의 어린 아기를 바라본다.) 동연이를 닮았군요.

[함묘진] 난 이 애가 날 닮기 바랬는데---

[서연] 마음은 닮았겠지요.

[함묘진] 너도 몹시 서운 할거다. 그렇지?

[서연] (침묵한다)

[서연] 저는 무능합니다. 요즈음엔--- 저의 무능을 절실히 느낍니다.

[함묘진] (서연을 살펴보며) 네 모습이 초췌하다. 부처의 마음인가.

[서연] (침묵한다)

[함묘진] 아직도 좋은 소식 없구나?

[서연] 네. 사부님께선 동연이를 잘 선택하셨습니다.

[함묘진] 선택은 동연이가 했어. 내가 한 게 아니구! 주기도 전에 빼앗긴 느낌이야. 조금만 기다리면 받을 건데, 왜 서둘러 빼앗는지 모르겠어!

[서연] (어린 아기를 다독거린다)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사부님. 숭인이가 잠듭니다.

[함묘진] (목소리를 낮춘다. 그러나 분노의 감정은 감추지 않는다) 동연이란 놈, 이제는 자기한테 불상제작장의 열쇠마저 넘겨 달라는 거야. 염치없는 놈--- 그런데 강제로 뺐긴 듯이 주면 뭐가 좋겠어? 오늘 같은 날도 그래. 나더러 결혼식엔 오지도 말라는 거야. 이런 마비된 몸으로 결혼식에 참석하느니, 차라리 애나 보면서 집에 있는 게 낫겠다는 군. 사실은 나도 가고 싶지 않았어. 가족끼리의 조촐한 결혼식도 아니고, 온갖 구경꾼들 다 모아 놓은 결혼식인데--- 참석해 봤자 초라하게만 보일 뿐이지.

[페이지] 018

[서연] (강보에 싸인 아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사부님을 초라하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함묘진] 아냐, 아냐. 보현사 주지스님도 동연이 놈만 최고로 안다구.

[서연] 지금이라도 보현사에 가시지요.

[함묘진] 난 안가!

[서연]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함묘진] 싫다니까! 나를 폐물 취급하는 곳엔 절대로 안가!

[서연] 사부님, 동연이를 너그럽게 대해 주십시오.

[함묘진] 너마저--- 그 놈 편을 들어?

[서연] 동연이는 형태를 만드는 탁월한 재능이 있습니다. 사부님께선 동연이가 주기도 전에 뺏는다며 화를 내시지만, 그건 동연이의 능력 때문이라고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함묘진] 그럼 결혼도 하기 전에 내 딸 몸부터 빼앗고, 후계자가 되기 전에 내 열쇠부터 빼앗아도 참으라는 거냐?

[서연] 사부님---

[함묘진] 왜 말을 못 해?

[서연] 저도 처음엔 형태에 집착하는 동연이가 못마땅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사람 사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모든 걸 형태가 결정하고 있더군요.

[함묘진] 결국은 내 잘못이군! 동연이 그 놈한테 내가 형태를 가르쳤거든! (자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것을 의식하며) 아이고, 이런! 어린것이 놀라 자지러지겠어!

[서연] 사부님, 숭인이를 보십시오.

[함묘진] 왜--- 울지 않지?

[서연] 잠든 줄 알았더니, 초롱초롱 눈을 뜬 채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군요

(동연과 함이정, 등장한다. 그들은 신랑, 신부답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다. 동연의 태도는 의기 양양하며, 함이정 역시 행복한 모습이다.)

[서연] 축하하네, 동연이.

[동연] 음, 자네 왔는가.

[서연] (함이정에게) 축하해. 진심으로.

[함이정] 고마워요, 서연 오빠---

[동연] 어떻게 알고 왔는가? 천지 사방 떠도는 자네가 우리 결혼식은 용케도 알았군.

[서연] 몰랐네. 알았더라면 빈손이 아닐 탠데--- 미안하네.

[페이지] 019

[동연] 미안할 것 없네. 자네 아니어도 우린 축하 선물 많이 받았네. 오늘 보현사가 굉장했어. 전국 큰 사찰의 스님들은 거의 다 오셨고,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불자들, 시주 잘하는 재력가들, 심지어는 절 근처에는 얼씬도 않던 일반 중생들마저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지. 그들은 내가 만든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보고는 그 정교함의 극치에 놀라 입을 딱 벌린 채 다물지 못하더군. 그런 감탄 속에서 불상 공개식을 갖고, 곧이어 우리 결혼식을 했지. 하하, 하하하, 효과 만점이었네! (함묘진에게) 기뻐해 주십시오. 훌륭한 스승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제자도 많습니다만, 저는 그 명예를 한껏 높여 드렸습니다.

[함이정] 아버지, 동연오빠 찬사가 대단했어요. 오늘 얼마나 많은 불상 주문을 받았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함묘진] (딸랑거리는 장난감을 흔든다) 난 기쁘다! 눈물 나게 기뻐!

[동연] 네--- ?

[함묘진] 이걸 흔들면, 기뻐서 울게 돼! (함묘진, 장난감을 흔들며 휠체어 바퀴를 돌려 퇴장한다)

[동연] 저 어른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군.

[서연] 동연이---

[동연] 뭔가?

[서연] 오해말고 들어주게. 사부님은 자네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으셔.

[동연] 난 잘못한 것 없어!

[서연] 결혼식장에 모셔 가지 그랬는가?

[동연] 내가 몇 번이나 간청했지만 거절당했지! 그런데 자네한테 뭐라시던가? 설마 오지 말라고, 내가 막았다고 불평하던가?

[서연] 자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닐세. 다만 그럴수록 조심하고, 지나치게 서둘 건 없네.

[동연] 서둘 것 없다--- ?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지? 나에 대한 질투인가? 아니면 원망 때문에?

[함이정] 서연 오빤 그런 분이 아니에요.

[동연] 가만있어, 당신은!

[함이정] 동연 오빠---

[동연] 난 오빠가 아니야! 당신의 남편이지!

[함이정] 여보---

[동연]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나가!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구!

[함이정] 이러시면 안돼요!

[페이지] 020

[동연] 내가 자네 마음을 모를 줄 아나? 천만에, 난 잘 알아! 자네 역시 나에게 모든 걸 빼앗긴 심정이겠지. 마치 저 고약한 어른이 나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을 자네도 가진거라구!

[서연] 동연이--- 난 그렇지 않네.

[동연] 똑같아, 똑같다구! 무능한 자들, 패배한 자들의 심보는 다 똑같은 거야!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문쪽을 가리킨다) 어서 나가! 그리고 다시는 이 집에 들어오지마!

(서연, 퇴장한다. 무대조명, 변화한다. 무대 조명은 어두워지고, 한복판이 밝아진다. 조숭인이 함이정의 손수건을 풀어서 조그만 돌들을 꺼내 바닥에 일렬로 늘어놓는다. 그는 조금 뒤로 물러나 앉아서 돌들을 바라본다. 사이. 함이정, 조숭인에게 다가온다.)

[함이정] 뭘 하고 있지?

[조숭인] 바라보고 있어요, 돌들을요.

[함이정] 왜 이건 꺼냈어? 손수건에 싸 두렴!

[조숭인] 어머니도 가끔씩 꺼내보곤 하시잖아요?

[함이정] 어서 싸 둬! 너희 아버지가 아시면 큰일 나!

[조숭인] 전 저 돌들을 바라보면서, 서연이란 분을 생각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였어요. 태어난 지 한 두 달쯤 되었을까요, 그 분이 우리집에 오셨었죠.

[함이정] (바닥에 일렬로 놓여있는 돌들을 주우며) 설마 네가 그 분을 기억할 리는 없지.

[조숭인] 저는 기억해요.

[함이정] 숭인아--- 서연오빠는 십여년전에 다녀가셨다. 그 후엔 단 한 번도 오신적이 없어.

[조숭인] 그 분은 나를 보고 말씀하셨죠, 이 아인 소리에 민감한 것 같다고.

[함이정] 정말? 그런 말을 했어?

[조숭인] 네, 어머니. 저는 태어나기 전 일도 모두 기억해요. 어머니와 나눴던 모든 말들--- 노래도 기억나요. (가사를 읊는다.)

"저 하늘 흰 구름 양들이 되어서

조용히 떼지어 몰려다니네"

그 때 어머니께 약속했었죠. 열심히 노력해서, 동연 서연 두 분의 목소리를 합쳐 놓겠다구요. 어머니, 저는 그래서 음악가가 될 겁니다.

[함이정]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이 되며) 뭐, 음악가--- ?

[조숭인] 네. 두 분의 소리는 너무 달라서,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려면 고민을 많이 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의미인 것 같기도 하고, 감당해

[페이지] 021

야 할 운명인 것 같기도 해요.

[함이정] 하지만 네 아버지가 승낙하실까? 아버진 네가 크면 불상 제작을 배워 대를 잇기 바라시는데---

[조숭인] 아버진 저를 알지 못해요. 저에게 어떤 재능이 잇는지,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전혀 알려고 하지 않죠. 아버지는 어머니도 몰라요. 어머니가 행복한 지, 불행한 지--- 오직 자신의 일에만 관심 있어요.

[함이정] 불상 만드는 일은 어려워. 더구나 완벽하게 만든다는 건---

[조숭인] 형태에 집착한면 펴협해져요. 항상 잔뜩 긴장해있고---

[함이정] (돌들을 손수건으로 싸서 묶으며) 부탁이다, 응? 제발 아버지 좀 미워하지 말아라.

[조숭인] 그런데, 어머니는 왜 그 돌들을 갖고 계세요?

[함이정] 갖고 있다니--- ?

[조숭인]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하기 때문이죠?

[함이정] 아냐, 아냐. 그냥 간직해 둘 뿐이야.

[조숭인] 아니라고 부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눈에 띄일까봐 두려워 하면서도 소중히 간직해 두시는걸요.

[함이정] (침묵한다.)

[조숭인] 서연이란 분 궁금해요. 지금은 어디서 뭘하고 계실까--- 무슨 소식 못 들으셨어요?

[함이정] 우연히 듣긴 했다만--- 전라도 어디라든가--- 어떤 절의 스님이 불상을 주문하러 오셨다가 말씀하셨어. 서연 오빠는 미치광이래---

[조숭인] 미치광이라뇨?

[함이정] 응, 괴상한 짓을 한 댔어. 하염없이 들길을 따라 걸어다니면서, 돌들을 주워서는 돌부처를 만들어 놓는 다는구나.

[조숭인] 돌부처요--- ?

[함이정] 큰돌은 몸통 삼고, 작은 돌은 머리 삼아, 그냥 큰 돌 위에 작은 돌을 얹어 놓는 거래. 그런 돌부처님이 들판에 줄줄이 늘어서 있다는구나. 어리숙한 건 그 곳 사람들이란다. 돌부처 앞에 경건히 합장을 하고, 간절히 소원도 빈다는 구나. 그 소식 전한 스님, 서연 오빠 때문에 사람들마저 괴상해진다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더라.

[조숭인] 참 이상해요. 난 무의식적으로 그 분의 돌들을 꺼내 늘어놓았죠. 그런데 알고보니, 서연이란 그 분이 한 일을 나도 따라 했군요.

(동연, 몹시 성난 태도로 등장한다)

[페이지] 022

[동연] 안 되겠어, 도저히.

[함이정] 무슨 일이에요?

[동연] 불상 제작장에 들어와서는 쓸 데 없는 잔소리만 해! 그 어른 머리까지 마비된 거야. 완전히, 노망드셨어!

[함이정] 당신이 참으세요. 아버지는---

[동연] (함이정의 말을 앞지르며)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당신도 잘 알거야. 이번에 만드는 약사여래좌상의 형태를! 불상 본체 뒤에 달린 화염의 광배, 그 활활 타오르는 불길 하나 하나를 만들려면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해! 그런데 노망든 어른이 아침에 와서는 그 광배가 본체보다 너무 크다 잔소릴 하고, 저녁에 와서는 광배가 본체보다 너무 작다는 거야! 크다, 작다, 크다, 작다--- 이러다간 내가 미치고 말겠어!

[함이정] 미안해요, 여보. 그 정도로 심한지는 몰랐어요.

[동연] 출입금지야, 오늘부터!

[함이정] 네--- ?

[동연] 더 이상 그 어른을 내 작업장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되겠어!

[조숭인] 못 들어오게 한다구요? 할아버지를요?

[동연] 그래! 절대 출입금지야!

[조숭인] 원래 그 곳은 할아버지의 작업장이었는데요?

[함이정] 아버지를 금지시키시면--- 몹시 슬퍼하실 거예요.

[동연] 슬퍼해도 하는 수 없지!

[조숭인] 아침에 오셔서 너무 크다 말씀하시면 그건 작다는 뜻이구나, 저녁에 오셔서 너무 작다고 하시면 그건 크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아버지는 할아버지 때문에 미치지는 않으실 겁니다.

[동연] 너, 지금 나한테 말장난하는 거냐?

[조숭인] 아뇨.

[동연] 아니면 뭐냐?

[조숭인] 아버지를 웃겨서 긴장을 풀어드리려구요.

[동연] 나를 웃겨?

[조숭인] 네. 아버지는 언제나 긴장해 계시거든요. 저도 간혹 아버지 작업장에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죠. 하지만 겁부터 먹어요. 그래서 들어가지 못해요. 그건 저에게 참 슬픈 일이에요.

[동연] (조숭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본다) 네가 분명 내 아들이냐?

[함이정] 왜 그런 말을 하시죠?

[동연] 생긴 건 날 닮았는데, 하는 짓은 전혀 나하곤 달라!

(함묘진, 휠체어 바퀴를 힘겹게 굴리면서 들어온다. 그의 온 몸은 금동

[페이지] 023

으로 칠 해졌고 등 뒤에 화염광배를 달고 있는 생불의 모습으로 얼굴은 안면 근육의 마비로 일그러지고 두 손은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함묘진] 동연아! 동연아! 너는 크게 만들 건 작게 만들고, 작게 만들건 크게 만들었다! 부처님 본체가 너무 커! 뒷 광배는 너무 작고! 아주 괴상해! 동연아! 동연아! 넌 괴상한 걸 만들었구나!

[동연] 날 매정하게 생각하지마! 장인 어른은 출입금지야. 난 작업장 문을 잠궈버리겠어!

[조숭인] 아버지, 오해 마세요.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웃기려고 그러실 뿐이에요.

[동연] (조숭인의 뺨을 때린다) 너나 실컷 웃으렴! (동연, 휙 돌아서서 퇴장한다. 함이정은 뺨을 맞은 조숭인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된다. 조숭인, 침착한 어조로 말한다)

[조숭인]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전 괜찮아요.

[함묘진] 나도 괜찮다. (경련을 일으키는 손으로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보이며) 이것 봐라. 문을 잠궈도 난 열 수가 있어.

[함이정] 아, 아버지--- 안 돼요!

[함묘진] 동연이 놈한테만 열쇠가 있는 게 아니야. 나도 있어. 이럴 줄 알고 똑같은 걸 하나 복사해서 감춰 뒀지.

[함이정] (함묘진에게 다가가며) 저를 주세요, 그 열쇠는요! 아버진 그 곳에 가실 것 없어요!

[함묘진] (휠체어 바퀴를 굴려 뒤로 물러난다) 싫다! 이건 내 거야!

[함이정] 제발, 아버지!

(함묘진, 열쇠를 꼭 움켜쥔 채 퇴장한다. 함이정이 함묘진의 휠체어를 붙잡으려고 뒤따라간다. 조숭인은 홀로 남는다. 그는 피아노에 가서 건반위에 두 손을 얹더니, 즉흥적으로 건반을 눌러 쾅쾅, 쾅쾅쾅, 쾅쾅, 폭음을 낸다. 폭음과 폭음 사이에 뚜렷하게 느껴지는 침묵이 있다. 함묘진을 뒤쫓아갔던 함이정이 빈손으로 되돌아온다)

[함이정] 걱정이다, 열쇠를 안 주셔---

[조숭인] 어머니, 들어보세요. 방금 제가 작곡한 거예요.

[함이정] 느낌이 불길해. 뭔가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조숭인] 뺨을 맞고 확실히 결심했죠. 저는 작곡가가 되기로요. (열 손가락으로 한꺼번에 건반을 눌러 폭음을 낸다) 이 소린 아버지예요. 귀에 들리는

[페이지] 024

것, 눈에 보이는 것, 이렇게 아버지는 형태로 나타나요. (건반에서 손을 떼며) 하지만 이 침묵은 서연이란 분입니다. 들리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그 분은 아무 형태가 없어요. (폭음과 침묵을 비교하듯 반복하며) 잘 들어보세요, 어머니. 소리와 침묵이 내 마음속에서 서로 다투고 있어요.

[함이정] 그만 해라, 숭인아! 듣기 싫어!

[조숭인] 저도 이런 불협화음은 듣기 싫어요.

[함이정] 제발 그만해! (조숭인의 두 손을 잡아 중단시킨다.) 넌 아직 음악을 몰라! 피아노 연주를 할 줄도 모르고, 더구나 작곡이란건 배운 적이 없잖아!

[조숭인]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말씀이군요.

[함이정] 그래!

[조숭인] 인생이 불협화음이란 건 알아요. 그걸 어떻게 아름다운 화음으로 만드느냐, 그게 앞으로의 문제죠. (조숭인, 피아노를 떠나 문을 향해 걸어간다. 함이정,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이다.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피아노 앞에 앉아 서정적인 곡을 연주한다. 하지만 음정과 박자가 자주 틀린다. 그녀는 연주를 멈춘다. 침묵 속에서 부동자세로 앉아 있더니, 일어나 자기 방쪽으로 걸어간다. 무대 조명, 암전한다. 집과 제작장 사이의 마당. 살구나무 아래 조숭인이 앉아서 작곡법 책을 읽고 있다.)

[조숭인] "작곡이란 소리들을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하는 행위이다. 또한 작곡이란 마음 속의 느낌을 악상으로 가다듬어서, 그 악상을 음악적 형식으로 완성시켜야 한다." 형식--- ? 그럼 음악에도 형식이 중요하다 그 뜻인가? "작곡은 악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악보란 음악의 언어기호이다. 그러므로, 작곡가가 되려면 악보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아울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음악적 법칙에 따른 구성기술이 필요하다." 맙소사--- 몇번이나 형식과 법칙을 강조하고 있군! (앉은 자세에서 옆으로 눕는 자세가 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형식이 중요하지? 내 생각엔 오히려 느낌이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작곡법 책을 덮어 베개처럼 머리밑에 받친다. 그리고는 드러누워서 허공에 뻗친 살구나무 가지들을 바라본다.) 가만 있자, 저기 살구나무의 가지마다 높고 낮게 살구들이 매달려 있군. 마치 음악의 음표들처럼--- 난 저 음표만 바라봐도 입에 잔뜩 침이 고여. 왜냐하면 살구는 시디시다는 느낌때문이지. 그러므로 --- 살구는 그 형태 이상으로 느낌이 중요해. 그 점을 음악과 비교하면서 좀 더 생각해 봐야 겠어. (입을 크게 벌리고 살구가 떨어지기를 기

[페이지] 025

다리며) 난 생각하면서 기다린다, 잘 익은 음표 하나가 내 입안으로 떨어지기를--- 아아--- 더 크게 벌리고 --- 아아---

(동연, 작업장 쪽에서 다급하게 함묘진의 휠체어를 밀면서 등장한다. 온 몸이 피투성이인 함묘진이 휠체어에 실려 있다. 동연은 살구나무 아래 누워 있는 조숭인을 발견하고 휠체어를 멈춘다)

[동연] 큰일났다! 장인 어른이 죽었어!

[조숭인] (반듯하게 누운 채) 할아버지가 죽다뇨--- ?

[동연] 어서 일어나!

[조숭인] 잠깐만 기다려요. 아버지.

[동연] 열쇠로 잠긴 문을 열려다가 어떻게 된 모양이야! 어서 일어나라니까! 작업을 마치고 나왔더니 휠체어는 저 멀리 굴러가 있고, 몸은 튕겨진 듯 쓰러져 있었어!

[조숭인] (일어나서 휠체어를 향해 다가온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동연] 불러 봐야 소용없다!

[조숭인] 목이 흔들 흔들거려요. 목뼈가 부러졌는지--- (꺾여서 흔들거리는 함묘진의 머리를 바로 세운다) 어머니의 느낌이 맞군요. 그 열쇠 때문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거라고 하셨죠.

[동연] 미리 알았으면 열쇠를 뺏었어야지!

[조숭인] 어머니는 뺏으려고 했죠. 하지만 할아버진 절대로 그것만은 안 주셨어요.

[동연] 비켜라. 네 어머니한테 알리러 가야겠다!

[조숭인] 이런 모습으론 가지 마세요.

[동연] 가지 말라--- ?

[조숭인] 할아버지는 여기 두고, 아버지 혼자 가셔서 어머니를 만나세요. 그리고는 조용히, 부드럽게, 충격을 덜 받도록 먼저 위로의 말씀부터 하시죠.

[동연] 뭐, 조용히? 부드럽게?

[조숭인] 네.

[동연] 난 잘못 없다! 네 할아버지 잘못이야! 더구나 네 어머니의 책임도 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도 막지 못했잖아!

[조숭인] 진정하세요, 아버지. 차라리 어머니한테는 제가 말하는 게 낫겠군요. 아버진 살구나무 아래에서 기다리시죠.

[동연] 비켜라, 비켜. 내가 간다! (동연, 함묘진의 주검이 실린 휠체어를 앞으로 밀어붙친다. 조숭인은 비켜선다. 함묘진의 목 뒤를 받쳤던 작곡법 책이 떨어진다. 조숭인은 책

[페이지] 026

을 코앞에 대고 피 냄새를 맡더니 토할 듯한 표정이 된다. )

[조숭인] 비릿해, 피 냄새는--- 토할 것 같아.

(죽은 함묘진, 휠체어 바퀴를 굴리면서 들어온다. 그의 등뒤에는 불상의 화염광배와 같은 것이 매달려 있는데, 완전히 밀착되지 못하고 덜렁덜렁거린다.)

[함묘진] 이게 내 몸에 맞질 않아.

[조숭인] 아, 할아버지---

[함묘진] 너무 큰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작은 것 같기도 하고--- 꼭 맞질 않으니 덜렁덜렁 불편하구나.

[조숭인] 할아버지 목도 흔들거려요.

[함묘진] 음, 내 목도 그래. 날 보더니 네 어머니가 기절했다. (손에 들고 있는 열쇠를 보여주며) 숭인아, 난 지금 극락문을 열려고 간다. 하지만 이 열쇠가 맞을지 걱정이구나. 열쇠가 너무 큰 건 아닌지, 너무 작은 건 아닌지--- 극락문이 안 열리면 지옥문이라도 열어야지.

(죽은 함묘진, 퇴장한다. 그의 부러진 목이 흔들리고 등뒤에 매달린 화염광배가 덜렁거린다. 조숭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함묘진의 퇴장을 지켜본다. 무대 조명, 암전한다. 함이정의 방. 조명이 비친다. 허리 높이의 좌대 위에 황금으로 만든 작고 정교한 석가여래좌상이 놓여 있다. 동연이 황금의 불상 곁에 서 있고, 함이정은 불상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 동연, 엄숙한 태도로 말한다)

[동연] 내가 만든 거야. 특별히 당신을 위해 만든 황금 석가여래좌상이라구.

[함이정]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려 석가여래 좌상을 바라본다)

[동연] 요즘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야. 귀신한테 놀랐는지, 허깨비한테 홀렸는지, 뒤숭숭해진 마음을 못 잡고 있어. 이 불상을 잘 봐. 석가여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깨달음을 얻는 때의 모습이야. 당신도 이런 형태로서 명상을 해. 일체 잡념을 버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아. 그럼 앉는 자세부터 고쳐야 겠군. 자, 결가부좌로 앉으라구.

[함이정] (석가여래 좌상을 응시할 뿐 미동하지 않는다.)

[페이지] 027

[동연] 내 말 안 들려?

[함이정] 네--- ?

[동연] 결가부좌! 결가부좌도 몰라? (동연이 함이정에게 다가온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움직여 항마좌 형식으로 만든다)

[동연] 결가부좌에도 두 가지 형식이 있지. 왼발 위로 오른발을 올려놓는 걸 길상좌(吉祥座) ,이렇게 오른발 위에 왼발을 올려놓는 건 항마좌(降魔座) 라고 해. 항마좌는 마귀의 항복을 받는다 그 뜻이지. (함이정의 팔을 붙잡고 선정인의 형태를 만들며) 손도 그래, 손가짐의 형태에 따라서 의미도 달라져. 왼손을 펴서 다리위에 놓고, 왼손위에는 오른손을 포개 놓지. 이렇게 두 손의 엄지손가락들을 서로 맞댄 형태가 선정인(禪定印) 이야. 발은 항마좌, 손은 선정인, 이런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 온갖 들끓던 마귀들이 항복하게 된다구. 내 말 듣고 있어?

[함이정] 네--- 듣고 있어요---

[동연] 이럴 땐 숨쉬는 형식이 중요해. 입으로 뱃속 깊이, 숨을 들여 마셨다가, 천천히 조금씩 코로 내쉬라구. (단전호흡을 시범 해 보이며) 자, 이렇게.

[함이정] (동연이 시키는 대로 호흡한다)

[동연] 좋아. 이대로 가만히 명상해.

(죽은 함묘진, 덜렁거리는 화염광배를 매달고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들어온다. 떨리는 손에 열쇠를 쥔 그는 몹시 낭패한 표정이다)

[함묘진] 열리지 않아, 극락문이.

[함이정] 아, 아버지---

[함묘진] 지옥문도 열어 봤다. 지옥문도 안 열려. 난 어디든지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극락에도 못 들어가고, 지옥에도 못 들어가.

[함이정] 아버지---

[함묘진] 이 열쇠가 너무 큰 탓인지, 너무 작은 탓인지, 아무 문도 안 열려. (죽은 함묘진, 휠체어 바퀴를 뒤로 돌려 물러난다. 함이정은 그를 붙잡으려는 듯 두 손을 뻗어 내젓는다)

[함이정] 아버지, 어딜 가세요?

[함묘진] 극락문을 다시 열어 보려고. 안 되면 지옥문을 열어 봐야지.

[페이지] 028

[동연] 왜 또 뭐가 보여?

[함이정] 아버지가--- 저기, 아버지가---

[동연] 저기 누가 있다는 거야? 분명히 장인어른은 관에 담겨 땅 속에 묻혔어! 스님들이 향불을 피우면서 극락에 가시도록 염불도 외우셨고! 당신도 장례식에 있었잖아!

[함이정] 그런데 자꾸만 보여요. 극락에도 못 가고, 지옥에도 못 가고---

[동연] 그건 당신 마음이지. 당신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오락가락 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라구!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함이정]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미안해요---

[동연] (함이정을 달래듯 눈물을 닦아주며) 울지 마. 난 당신을 사랑해. 지극히 사랑한다구. 그걸 모르겠어?

[함이정] 알아요, 알아요---

[동연] 안다면서 바보같이--- 당신 때문에 난 일을 못 하고 있어. 주문 받은 불상들이 잔뜩 밀려 있는데도, 당신이 이 지경이니 일을 할 수가 없잖아. (함이정의 얼굴을 붙잡고 입맞춘다) 당신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군. 건조한 사막처럼--- 이 조그만 얼굴 속에, 눈은 바다가 되었고, 입술은 사막이 되다니--- 이런 복잡한 상태로는 명상이 안 되겠어! 일어나! 당장 일어나서 저 불상을 향하여 삼천배를 해!

[함이정] 삼천배를요--- ?

[동연] 오체투지! 얼굴이 바닥에 닿도록, 온 몸을 던져서 절하라구! 그런 형식으로 삼천번 절을 해 봐! 뒤숭숭한 마음도 갈피를 잡게 되고, 복잡 미묘한 얼굴 표정도 단순 명료해 질 테니까! (함이정에게 명령조로 재촉한다) 어서 일어나! 당장 일어나서 시작해!

[함이정]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동연] 삼천번은 내가 세어 주지! (구령을 외치듯이) 하나!

[함이정] (석가여래 좌상을 향하여 오체투지의 절을 한다)

[동연] 둘!

[함이정] (엎드린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절한다)

[동연] 셋! 내가 만든 불상은 완벽해. 반드시 효험이 있다구!

[함이정]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절한다)

[동연] 넷!

[함이정] 여보---

[동연] 벌써 지쳤어?

[함이정] 당신은 이만 가세요, 나 혼자 두고--- 당신에겐 일이 있잖아요.

[동연] 혼자 둬?

[함이정] 네.

[페이지] 029

[동연] 하지만 내가 없으면 절을 안 할텐데?

[함이정] 난 꼭 하겠어요.

[동연] 잊지마, 삼천번이야! 만약 중단했다 간 부처님의 큰 벌을 받게 돼! (동연, 퇴장한다. 함이정은 일어나서 온 몸을 던져 석가래여좌상을 향해 절한다. 사이, 조숭인이 들어온다. 그는 숫자를 앞당겨 헤아린다.)

[조숭인] 이천구백구십팔! 이천구백구십구! 삼천!

[함이정] 숭인아---

[조숭인] 삼천배를 다 했어요, 어머니.

[함이정] 이제 겨우 시작이야.

[조숭인] 형식에 얽매인 인간이 숫자를 셀 때는 하나, 둘, 셋 꼼꼼히 세지만 부처님은 달라요. 자비로우신 부처님은 일, 십, 백, 천 이렇게 듬성듬성 셈하시거든요. (엎드려있는 함이정을 부축해 앉히며) 이미 많은 절을 하셨잖아요. 보현사에 할아버지 장례 치르고 저 유명한 십일면관세은보살께 수 없이 절 하셨죠. 그랬는데 또 삼천배를 하실 거예요?

[함이정] 부처님이 내 절은 안 받으셔--- 아무리 절을 하고 빌어도--- 마음이 안정 안 돼.

[조숭인] 이러다간 어머닌 죽게 됩니다.

[함이정] 나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조숭인] 그건 불가능해요.

[함이정] 동연 오빠도 있고, 서연 오빠도 있으면 난 마음을 잡을 수 있어.

[조숭인] 어머니가 균형을 잃었다고 판단하신 건 옳아요. 하지만 옛날로 돌아갈 순 없죠. 뒤가 아니라 앞을 보셔야 해요.

[함이정] 앞을--- 앞을 보라구--- ?

[조숭인] 네. 미래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균형을 다시 맞추셔야죠. (함이정을 격려하며) 어머닌 잘 하실겁니다. 균형이 맞았던 경험을 갖고 계시니까, 그 옛 경험을 살려서 다시 맞추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저에겐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두 오빠 중에서 한 분에게 기울어진 다음에, 즉 균형이 깨진 결과로서 제가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것들은 모두 형식과 내용이 안 맞는 것들뿐입니다. 제 인생은 정말 어려워요. 이런 맞지 않는 것들을 맞추려고 노력은 해보지만, 경험이 없으니 잘 안 되는 거죠. 그러나 어머닌 쉬워요.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다른 한쪽으로 옮기면 되거든요.

[함이정] 너는 마치 나를--- 서연 오빠에게 가라는 듯이 말하는구나.

[조숭인] 어머니, 서연이란 분을 찾아가세요.

[페이지] 030

[함이정] 난 너를 두고는 못 간다---

[조숭인] 제 걱정은 마세요. 저는 다 컸어요. 아버지 걱정도 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테니까요. (조숭인,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 위에 손을 얹는다. 마음속의 느낌을 정리하는 듯 잠시 묵상하더니 즉흥곡을 연주한다. 함이정, 조숭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뒤돌아 서서 퇴장한다. 사이. 동연 들어온다. 그는 조숭인의 피아노 연주가 의외라는 표정이다)

[동연] 피아노를 친다? 숭인이, 네가--- ?

[조숭인] 아버진 모르셨어요?

[동연] 너의 어머니가 가르쳐 주던?

[조숭인] 아뇨.

[동연] 그럼 누구한테 배웠지?

[조숭인] 혼자 서요. 연주법, 작곡법, 책을 사다가 배웠죠.

[동연] 피아노는 여자들이나 할 짓이다. 그것도 심심할 때 가끔씩 치는 거지.

[조숭인] 저는 작곡가가 될 겁니다.

[동연] 뭐, 작곡가--- ?

[조숭인] 네. 지금 연주하고 있는 것도 제가 작곡한 거예요.

[동연] 내 귀엔 불협화음으로만 들린다. (꾸짖듯이 엄한 태도로 말한다) 넌 가업을 이어야 해. 내 뒤를 이어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불상 제작가가 되어야 한다.

[조숭인] 전 음악이 불상보다 좋아요.

[동연] 너, 제 정신이냐?

[조숭인] 물론 제 정신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동연] (피아노에 다가와서 건반 위에 조숭인의 손이 놓여 있음에도 피아노 뚜껑을 닫는다.) 피아노는 금지한다!

[조숭인] (피아노 뚜껑에 눌린 손을 빼내며 아픈 표정을 짓는다) 아, 아버지---

[동연] 넌 내일부터 작업장으로 나와! 내 제자가 되어 불상 만드는 법을 배워!

[조숭인] 저는 음악학교에 가겠습니다.

[동연] 음악학교--- ?

[조숭인] 네. 집에서 책만 보고는 안 되겠어요.

[동연] (함이정을 부른다) 여보, 이리 와 봐! 이 놈이 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조숭인] 달아나셨어요, 어머니는.

[동연] 여보! 이리 오라니까!

[조숭인] 아버지의 불상 때문이에요. 불상 형태가 너무 완벽했거든요. 아주 잘생긴

[페이지] 031

미인한테는 말 걸기가 쉽지 않듯이, 너무 잘 만든 부처님께는 마음 통하기가 어려운 거죠. 아무리 절을 해도 받아 주지도 않고, 그러니까 어머니는 그만 견디다 못해 도망가셨어요.

[동연] 도망가기는, 그럴 리 없다. (석가여래좌상 앞으로 가서 주위를 둘러본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냐? 너희 어머닌 삼천배를 안 하고 어딜 간 거야?

[조숭인] 돌부처님한테 갔어요. 형태를 무시하고 그냥 아무렇게나 돌을 주워 만든 부처님한테로요.

[동연] 돌--- 부처--- ?

[조숭인] 전라도 어디라든가, 서연이라는 분이 만들고 있다는군요.

[동연] 설마--- 서연이 그놈에게--- ?

[조숭인] 음악학교엔 기숙사도 있겠지만 저는 집에서 통학할 겁니다. 그래야 아버지 밥도 해 드리고, 빨래도 해 드릴 수 있죠. 아버지는 오직 불상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세요.

[동연] 뭔가 큰 오산을 했군! 그 무책임한 놈이, 아무 것도 못하는 그 무능한 놈이, 네 에밀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아? 더구나 그놈은 거지야! 돈 한푼 없이 떠돌아 다니는 거렁뱅이라구!

[조숭인] 글쎄요,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동연] 네 에민 화냥년이야! 나하고 결혼해 살면서도 언제나 그놈을 그리워하고 있었어!

(동연, 분노를 삭이지 못해 욕설을 하며 퇴장한다. 그의 걸음이 부자연스럽다. 하반신 마비 증세가 나타난다. 무대조명, 어두워진다. 허공에 가득히 별들. 들판. 황량한 바람 소리. 함묘진,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면서 어둠 속을 지나간다. 그의 등뒤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화염광배는 야광의 푸른빛을 낸다)

[함묘진] 피곤하다, 피곤해--- 극락문도 안 열리고, 지옥문도 안 열려. 어디든지 들어가 쉬고 싶은 데, 이 빌어먹을 열쇠가 맞질 않아--- 혹시나 맞을까 해서 저 문으로 갔다가, 역시나 맞지 않아 이 문으로 되돌아오고--- 이 문에서도 안 맞아 다시 저 문으로--- 왔다 갔다 하고 나면 하루의 낮과 밤이 바뀐다구. 그래도 밝은 낮에 극락문을 열려고 갈 때는 덜 피곤한데, 어둔 밤에 지옥문으로 갈 때는 녹초가 될 만큼 지쳐 버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나--- 백년 동안? 천년 동안? 아니면 영원토록--- ? 맙소사, 피곤하군--- 정말 피곤해--- (함묘진, 중얼거림을 멈추고 어둠 속을 응시한다)

[페이지] 032

[함묘진] 누가 또 있군. 왔다갔다하는 자, 나 이외에도 또 있어. (어둠 속을 향해 묻는다) 누구요. 거기? 도대체 누가 이 밤중에 들판을 헤매고 다녀?

[함이정] (소리) 아버지?

[함묘진] 아버지라니--- ?

[함이정] (소리) 아버지의 음성인데요?

[함묘진] 잘 안 보인다, 가까이 오렴!

(함이정, 함묘진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녀는 야위었고, 남루한 옷을 입고 있고 기다란 나뭇가지를 지팡이처럼 짚고 있다)

[함묘진] 그래, 너로구나! (함이정을 유심히 살펴보며 혀를 찬다) 쯧쯧, 네 꼴이 그게 뭐냐? 굶어 죽은 귀신도 너보다는 살이 쪘고, 거렁뱅이 귀신도 너보다는 잘 입었다!

[함이정] 아버지, 서연 오빠를 보셨어요?

[함묘진] 서연이를--- ?

[함이정] 네.

[함묘진] 서연이는 왜 찾아?

[함이정] 보셨거든 말씀해 주세요. 난 꼭 만나야 해요.

[함묘진] 그럼 넌 동연이 한테 쫓겨나 서연이 한테로 가는거냐?

[함이정] 사람들 말로는, 서연 오빤 이 들판에 있다는군요. 여기저기 들길을 떠돌아 다니면서 돌부처를 만들어 놓는대요.

[함묘진] 그렇다고 너마저 정처없이 들판을 헤매다니냐?

[함이정] 난 많이 봤어요, 길가에 세워진 돌부처들요. 하지만 서연 오빤 못 만났어요.

[함묘진] 글쎄--- 그 동안 뒤만 쫓아다닌 것 아니냐? 돌부처 있는 길에서 못 만났거든, 돌부처 없는 길에서 기다려라. 그래야 만날 수 있지. 이미 지나간 길을 뒤쫓아 다녀봤자 헛수고 할 뿐이다.

[함이정] 그렇군요, 아버지. 서연 오빠 만나려면 지나간 길이 아닌, 지나갈 길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걸 몰랐어요!

[함묘진] 피곤하다, 피곤해--- 벌써 새벽닭이 우는구나!

(멀리서 장닭들이 홰를 치며 울어댄다. 함묘진, 그 소리에 쫓기듯이 휠체어 바퀴를 굴리면서 나간다. 함이정, 그를 부른다)

[함이정] 잠깐만요, 아버지!

[함묘진] 시간 없다! 해 뜨기 전에 나 지옥문까지 가야해!

[페이지] 033

[함이정] 내가 극락문을 열어드릴께요!

[함묘진] (휠체어를 멈추고 뒤돌아 본다) 네가 어떻게? 맞는 열쇠라도 가졌느냐?

[함이정] 열쇠는 없지만, 마음은 있어요!

[함묘진] 마음--- ?

[함이정] 내 마음이 극락을 느끼면 극락문이 열리고, 지옥을 느끼면 지옥문이 열려요! 난 서연오빠를 만나면 극락을 느낄거예요. 그 때, 극락문이 열릴 때, 아버진 그 안으로 들어가세요!

[함묘진] 쯧쯧, 너무 장담하진 말아라.! 네가 극락을 느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함묘진, 다급하게 서둘러 퇴장한다. 차츰차츰 먼동이 떠오른다. 함이정은 나뭇가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자신이 서 있는 길을 바라본다)

[함이정] 새벽의 여명 때문일까--- 아니면 내 마음의 느낌 때문일까--- 넓고 넓은 들판은 아직 어둠속에 묻혀 있는데, 오직 한줄기 이 길만이 환하게 밝아오네. 숭인아, 숭인아, 내 아들아, 너에게 이 광경을 보여 주고 싶구나. 여기저기 헤맬 때는 길과 마음이 따로따로 나눠지더니만, 이제 멈춰서서 기다리는 이 길은 내 마음과 하나로 이어졌다.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어도 나는 느껴. 이 길을 지나가는 모든 움직임을 아주 예민하고 섬세하게--- 사람들이 지나간다. 가축들이 지나가고, 아주 조그만 벌레들도 지나가--- 다가온다--- 서연오빠가 다가온다--- 서연 오빠가 돌부처를 만들며 다가온다---

(무대조명이 바뀐다. 조숭인, 이동식 식탁을 밀면서 들어온다. 그는 동연의 방을 향해 외친다)

[조숭인] 아버지, 아침 식사하세요!

[동연] (소리) 먹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조숭인] 그래도 드셔야죠!

[동연] (소리) 너나 혼자 먹어라!

[조숭인] 어서 나오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오실 때까지 외칠 거예요!

[동연] (소리) 알았다! 조금 후에 나가마!

[조숭인] 지금이요, 지금!

(동연, 휠체어를 타고 등장한다. 밤에 잠을 못 이룬듯 부시시한 모습이다. 그는 이동식 식탁 앞에 멈춘다.)

[페이지] 034

[조숭인] 오늘 아침엔 죽을 끓였어요.

[동연] 죽이라고--- ?

[조숭인] 네. 식욕없는 아버지를 위해 특별히 끓인 겁니다. (이동식 식탁 앞에 의자를 갖다놓으며) 앉으세요, 아버지. 이 식탁 기억나시죠?

[동연] (의자에 앉아서 식탁을 바라본다) 음, 이건---

[조숭인] 할아버지가 쓰시던 거예요.

[동연] 그랬었지.

[조숭인] 어머닌 이 식탁에 음식을 차려서 할아버지께 드렸죠. 저도 사용해 보니까 편리한데요.

[동연] (침묵한다)

[조숭인] 어서 식기 전에 드세요.

[동연]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고 죽을 떠서 먹으며) 요즈음엔 맛을 모르겠다. 뭘 먹어도---

[조숭인] (동연이 쥔 숟가락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본다) 아버진 손을 떠시는 군요.

[동연] 이 죽 역시 짠 건지, 싱거운 건지---

[조숭인] 조심하세요. 흘려요.

[동연] 잠을 못 자서 그래. 어젯밤 뜬 눈으로 지샜는데--- 어둠속에서 네 에미가 보이더라.

[조숭인] 저도 봤어요.

[동연] 너도 봤어?

[조숭인] 네. 할아버지와 무슨 말씀을 하던걸요.

[동연] (호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놓으며) 이거, 어제 받은 편지다. 지금 읽지 말고, 식사 끝난 뒤 너 혼자 읽어.

[조숭인] 무슨 편지인데요? (편지봉투를 집어들고 바라보며) 어머니 글씨는 아닌 것 같고---

[동연] 나중에 읽으면 알게 돼.

[조숭인] (편지봉투를 다시 내려놓는다) 그러죠.

[동연] 숭인아.

[조숭인] 네?

[동연] 너, 내 가업을 이어라. 작곡인가 뭔가 그 쓸데없는 짓은 걷어치우고, 불상 만드는 법을 배워.

[조숭인] 아버지에겐 제자들이 있잖아요?

[동연] 제자들이야 있지. 하지만 다들 바보 같은 놈뿐이다!

[조숭인] 왜요?

[동연] 그 놈들은 골이 비었는지 똑같은 형태로만 만들어!

[조숭인] 아버지도 똑같게 만드시잖아요.

[동연] 난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거고, 그 놈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페이지] 035

하는거야! 오직 완벽한 형태가 가장 완벽한 내용이라고 난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그 놈들은, 그 바보같은 놈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 그저 기계적으로, 기계적인 정확한 솜씨로 열 개, 스무 개, 똑같은 형태로만 만들어. 넌 그 놈들과는 달라. 뭔가 생각을 하고, 고민도 하거든. 네가 불상을 만들면 곧 대가가 될 거다. 대가가 되어야 돈도 벌고 명예도 얻어. 음악은 어떠냐? 네다 음악으로 성공할 것 같으냐?

[조숭인] 아뇨--- 그래도 저는 평생 음악을 할겁니다.

[동연] 난 전혀 음악이란 걸 모른다만, 듣는 뒤는 있어. 네가 작곡했다는 것들은 모두 시끄러운 불협화음 뿐이야. 듣는 사람만 고통스럽다구.

[조숭인] 작곡한 저는 더 괴로워요.

[동연] 물론 너도 괴롭겠지!

[조숭인] 소리와 침묵이 서로 다투기만 해요. 그 둘을 조화시킬 방법이 있을텐데---

[동연] (숟가락을 식탁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그건 불가능해!

[조숭인] 그만 드시려구요?

[동연] 불가능한 짓에 네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라!

[조숭인] 남기지 마시고 다 잡수세요.

[동연] 넌 참 이상한 놈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생긴 모습은 날 닮았는데, 하는 짓은 엉뚱했지! 지금도 그래! 모습만 봐서는 내 아들인데,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 건 내 아들이 아냐!

[조숭인]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예요.

[동연] 네가 하는 짓은 서연이라는 놈을 꼭 닮았어! (동연, 퇴장한다. 조숭인은 편지봉투를 집어서 속지를 꺼내 읽는다)

[조숭인] "존경하는 선생님께 삼가 문안 올립니다. 소승은 송덕사 주지로서, 불상 주문하는 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기에 기억하실 것입니다." 송덕사--- ? 언젠가 들은 것도 같은데--- "다름이 아니오라, 이 달 보름 소승은 송덕사 불자들과 더불어 방생법회 할 물고기를 가지고 들판 가운데의 저수지를 향해 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미치광이를 만났습니다. 그 미치광이란 선생님과 동문수학했던 자인데, 소위 돌부처를 만들어 이곳 순박한 촌민들을 현혹시켜 온갖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합니다." 아, 그 분이군! 서연, 그 분이야! "전에도 소승이 선생님께 말씀드린 자 있습니다만, 그 미치광이가 세워 놓은 돌부처에게 빌었더니 아들을 낳았다는 아낙네가 있는가 하면, 늙은 부모의 고질병이 치유되더라는 무식한 농사꾼, 울화가 치밀 적에 돌부처에게 하소연하고 나면 가슴속이 후련해진다는 청상과부, 심지어 지나가는 소나 말도 돌부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페이지] 036

절들 한다는 둥, 이런 헛소문 때문에 저희 송덕사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하, 이것 참 재미있군! "각설하옵고 소승이 알려 드리는 사실은 그 미치광이가 혼자 다니면서 그 짓을 하더니만, 이제는 선생님의 부인과 짝이 되어 소위 돌부처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야. 어머니가--- "소승이 혹시나 잘못 보지 않았는가 확인하고 또 확인해 봐도, 분명 선생님의 부인이 틀림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탁월하신 불상 제작가의 부인께서 돌부처나 만드는 미치광이와 함께 계셔서야 되겠습니까? 이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면, 고명하신 선생님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그 미치광이는--- 무슨 몹쓸 병에 걸렸는지 피골이 상접하여 얼마 못 살고 죽을 것만 같은데--- 소승의 판단으로는, 어서 속히 부인을 모셔 가심이 상책인 줄 압니다--- "

(무대조명, 전환된다. 무대 바닥에 구불구불 기다랗게 길을 나타내는 조명이 비춰진다. 들판. 초라한 누더기를 입은 야윈 모습의 서연과 함이정이 길을 따라 걸어온다. 그돌은 돌을 주워서 길가에 돌부처를 세운다. 큰돌을 주운 사람이 먼저 밑에 놓아 몸을 삼으면, 작은 돌을 주운 사람이 그 위에 얹어 머릴 삼는다. 그리고 그들은 나란히 서서 돌부처에게 경건히 합장한다. 바람 소리, 새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길을 따라서 크고 작은 돌부처들을 세워 나간다)

[함이정] 난 오빠와 함께 있으면 극락처럼 기쁨만 느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군요. 기쁜만큼 슬퍼요.

[서연] 슬프니깐 기쁘지--- 그게 극락이야.

[함이정] 나 좀 꼭 안아줘요, 오빠.

[서연] (함이정을 껴안고 등을 다독거린다) 울지마라. 어린애도 아닌데.

[함이정] 오빠, 서연 오빠---

[서연] 왜?

[함이정] 어렸을 땐 두 오빠와 행복했어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행복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 알아요. 기쁨도 알고, 슬픔도 알고---

[서연] 그래--- 우린 둘 다 너를 사랑해--- 이젠 웃어라. 모르면서 행복했으니, 알고서는 더 행복해야지. (서연, 기침을 한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앉는다. 함이정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연의 기침이 멎기를 기다린다)

[페이지] 037

[함이정] 오빠, 서연 오빠---

[서연] 언젠가--- 스승님을 찾아갔더니--- 동연이와 네가 결혼했더라. 숭인이란 총명한 애도 낳았고--- 그 날 동연이는 나한테 그랬지.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 때 나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세상은 온통 부처의 형상으로 가득차 있는데--- 부처의 마음은 보이지 않고--- 후회되더라--- 불상을 만들면 이 고생은 면할 수 있는 것을 왜 망설이는가--- 그래서 스승님께 되돌아갔었는데---

[함이정] 동연 오빠가 야박하게 내쫓았죠. 난 그냥 보기만 하였고---

[서연] 동연이가 날 내쫓은 건 참 잘한거지. 오히려--- 그렇게 해 주었기에 나는--- 완전히 단념할 수 있더라--- 난 들판을 헤매다녔다.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고--- 무엇으로 채워야할지 알 수는 없고--- 그랬는데--- 어느 해 겨울이었다. 흰 눈이 내리더라. 어찌나 많이 내리는지--- 하늘도 하얗고 땅도 하얗더니만--- 천지가 흰 공백으로 텅비더라. 나는--- 나는--- 그 텅 빈 공백이 무섭고 두려워서--- 네 이름을 불렀다--- 부루고--- 또 부르고--- 목이 터져라 너를 불러서 그 공백을 가득채웠는데--- 이듬해 봄--- 눈 녹는 봄이 되니깐--- 돋아나는 풀잎이며 피어 나는 꽃송이가--- 모두 네 모습이더라. 난 기뻤다--- 참으로 기뻐서--- 난 여기가 극락이라는--- 표시를 해 두고 싶었다. 그래서--- 돌을 주워--- 부처를 만들었지---

(서연, 일어나서 돌을 주워 길가에 놓는다. 함이정, 돌부처를 만드는 서연을 바라본다)

[함이정] 오빠, 서연 오빠---

[서연] 왜--- ?

[함이정] 오빠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군요.

[서연] 부처의 마음--- 난 아직 잘 몰라. 하지만--- 그 마음이 어디 있는지는 표시해 놨다--- 길에서 돌을 보는 사람은 부처를 보고--- 부처를 보는 사람은 극락을 본다--- .

[함이정] 난 배고파요. 오빠는요?

[서연] 배야 늘 고프지.

[함이정] 우리, 삶은 감자 먹어요. (함이정, 길가에 앉는다. 허리에 겹으로 접어 둘러맸던 보자기를 풀어서 감자들을 꺼낸다)

[함이정] 오빠는 두 개, 나는 한 개---

[서연] (함이정 옆에 앉아 감자를 먹는다) 맛있구나, 맛있어.

[함이정] (웃으며) 네, 꿀맛이예요.

[페이지] 038

(서연, 감자를 먹다말고 숨이 막힐 듯한 기침을 한다. 매우 쇠잔한 기침이다. 함이정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울먹이는 표정이 된다. 사이. 간신히 기침을 진정시킨 서연, 함이정에게 감자 하나를 되돌려 준다)

[서연] 나는 한 개, 너는 두 개---

[함이정] 오빠가 더 먹어요. 오빠는 몸도 약하고---

[서연] 난 이제 못 먹어.

[함이정] 오빠--- 서연 오빠---

[서연] 왜--- ?

[함이정] 오빠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죠?

[서연] 어제밤엔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 해 뜰 때 보니까, 돌부처님 머리가 하나도 남지 않고 떨어졌더라. 하지만 부처님 형상이 없어졌다고 부처님이 없어졌겠냐?

(서연과 함이정, 돌부처를 만들면서 길을 따라 간다.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 온다. 조명, 개울물의 흐름을 나타낸다)

[함이정] 개울물이예요, 서연 오빠. 여기서 길은 끊겼어요.

[서연] 끊긴 길은 없다. 돌아서서 다시 가는 길은 있어도---

[함이정] 그렇군요.

[서연] 난 이런 길을 참 많이 다녔다. 왔다가는 돌아가고--- 돌아갔다가는 다시 오고--- (개울가로 다가가서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며) 너도 마시렴. 목 마를텐데---

[함이정] (서연 곁으로 가서 개울물을 바라본다) 물위에 비춰 보여요, 우리 얼굴이--- .

(서연, 개울물로 걸어 들어간다. 그는 마치 물을 눈덩이처럼 뭉치는 동작을 한다)

[함이정] 오빠--- 뭘 하는거죠?

(서연, 흐르는 물위에 물로 만든 부처를 세워 놓는다. 부처의 느낌은 남고 형태는 곧 사라진다)

[함이정] 오빠, 이쪽으로 나와요.

[서연] (개울물을 건너가며) 난 이제 저쪽으로 건너간다.

[페이지] 039

[함이정] 서연 오빠---

[서연] 넌 나중에 건너 와.

[함이정] (손을 흔든다) 그래요, 오빠--- 먼저 가요. 나는 나중에---

(서연과 함이정, 잠시 개울물 양쪽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무대조명, 변화한다. 조숭인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작곡 중이다. 그는 한 손으로 오선지에 악보를 그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건반을 두드린다. 서연과 함이정을 비추던 조명은 희미해진다. 그 다음 개울물 조명마저 희미해지는데,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둣 함묘진이 다급하게 휠체어 바퀴를 굴리면서 들어온다. 그는 피아노 옆을 지나 개울물을 건너간다.)

[조숭인] 할아버지,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함묘진] 극락문이 열렸다! 극락문이 열렸어! (함묘진 멈추지도 않고 급하게 나간다.)

[동연] 송덕사 주지스님이 전보를 보내 왔다. 서연이가 죽었다는 구나.

[조숭인] (손가락 하나로 낮은 음 건반을 길게 누른다.) 어머니는요--- ?

[동연] 네가 직접 가서 봐라.

[조숭인] (일어서서 피아노 뚜껑을 닫는다)

[동연] 넉넉히 주마, 서연의 장례비용은.

[조숭인] 네.

(무대는 첫 장면 무대. 조숭인 들어오며)

[조숭인] 저예요, 어머니.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함이정. 무대조명 서서히 암전)
 


■ 이해와 감상

  <느낌, 극락 같은>공연에선 함이정과 아들 조숭인(이승헌 분)간의 대화가 주요 겉틀을 이루고 있다.  다른 남정네의 장례식을 주도하는 함이정, 아버지의 조의금을 대신 전달하는 그녀의 아들 조숭인, 장례식을 치르는 어머니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하다.  왜 그럴까.  수수께끼 투성이의 숨은 과거 속사연, 이를 풀어가기 위한 전략이 이야기의 겉틀을 이룬다.  노련한 이강백다운 극구성 설계이다.속이야기는 동연과 서연의 갈등과 대립이 주요 축을 이룬다.  형식미를 강조하는 동연, 형식보다는 느낌 즉 예술적 감동과 참다움 삶의 느낌을 강조하는 서연, 스승 함묘진의 후계자 문제로 다투는 관계, 스승 딸과의 사랑 문제로 다투는 관계, 이런 갈등과 대립 구조가 속이야기 속에서도 탄탄히 설계되어 있다.  
  주인공 함이정과 그녀의 아들 조숭인은 속이야기 속에 들어가 극중극을 펼쳐 보이기도 하고 틀극으로 빠져 나와 연극놀이의 맛과 판깨기의 멋 마저 경험케하는 역할까지 한다.  관객은 극중극에서 긴장과 떨림을 맛보면서 극속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틀극 이야기를 통해 판깨기의 재미를 경험한다. (김길수, 「삶과 예술, 그 구원의 합일미학」중에서

출처 : 침마실-시감상자료실
글쓴이 : 침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