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ㅡ 맨발의 기봉이들

시인 김상훈 2008. 7. 25. 19:19

그들은 모두 맨발의 기봉이었다. [특수]라는 명사가 반드시 따라붙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언어소통이 원활하고 정상적인 육체를 지닌 사람도 하기 어려운 연극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택도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나는 학교 관계자들을 믿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더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택도 없다]가 아니라 무조건 불가능하다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년원 아이들을 데리고 수개월 고생한 경험을 되살려 그 [택도 없다]와 [불가능]에 도전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나는 학교장의 승인 아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했다. 승인이라고는 하지만, 곧 제풀에 지치겠지, 될 리가 없지 식의 승인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계획을 짰고 철저하게 나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시작한 연극-,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몇초도 안 걸릴 대사 한 마디가 수 분이 걸리기 예사였다. 조금 긴 대사는 거의 모노드라마 수준으로 달렸다. 동선 한 발짝을 옮기기 위해 휠체어를 탄 아이는 누군가가 밀어주거나 끌어줘야 했는데, 영화가 아닌 이상 연극 메카니즘으로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행위였다. 더구나 난생처음 연극을 접하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따분함과 지루함이 반복되는 것에 진절머리를 느끼는 것 같았다.

방과 후, 나에게 두 시간만이라는 조건은 거의 형벌에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거의 두 달을 대본만 들고 씨름하면서 RNG를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공연날짜가 임박하면서 심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냥 오기로 출발한 작업이 조금씩 언론에 노출이 되면서 장학사, 학부형들, 연극협회장과 정치가들의 방문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들은 라면과 초코파이 몇 박스 들고 와서는 꼭 사진찍기를 잊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눌한 어투에 감정까지 실어서 동작을 취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겐 곤혹 그 자체였지만, 누군가 대사를 치면 중간에서 자르는 법 없이 그들은 상대방의 대사를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심을 보였다. 서로 불편한 것에서 느껴지는 진한 동질감이랄까. 정상적으로 뛰지 못하는 그 아이들과 나는 축구도 하고, 음악을 크게 틀곤 종종 엉성한 춤을 추곤 하였다. 연습이 끝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호떡과 오뎅을 파는 떡볷이집으로 향하는 것이 그날 하루의 마지막 코스였다.

아이들은 의외로 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식탐도 강했다. 대부분 부모형제로부터 진정한 아픔과 진정한 사랑으로 인해 과도한 관심만을 받고 자란 탓인지 보편타당성이 결여된 자기주장이 강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들 편에 서서 이야기를 들어줬고 심각한 성 정체성에 관해서 툭 터놓고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머리와 가슴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그들과 한편이 되는 것 같았다.

정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깊은 정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도 여러번.... 심신이 지쳐버린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선생님께 죄스럽다는 이유로 울었다. 학교 선생님들이나 부모들도 모르는 이러한 감정들이 쌓이면서 내가 그들의 불편한 육체와 어투를 흉내 내도 아이들은 까르르 넘어가기 예사였고 연작 형태로 기사를 올린 모 일간지 문화부기자 덕에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더 높아져 갔다.

공연날ㅡ, 장소는 시민회관 소극장. 사백 석 규모의 극장 안엔 거의 육백 명이 들어찼다. 나는 아이들에게 분장을 해주면서 "사랑해"라는 말을 하나하나 힘주어 남발했다. 무대감독도 없이 진행되는 무대라 더없이 불안했지만 무대 옆에서 소품이나 의상을 챙겨주겠다는 학부모들의 제의를 이미 거절한 상태였다. 아무런 도움 없이도 훌륭하게 해낸다는 것을, 당신의 아이를 통하여 느껴보라는 나름의 메시지였다.

공연시간은 짧았지만, 나는 그 공연이 끝날 때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소리없이 돌아가는 무성영화 필름처럼 아이들의 입 모양과 그들의 몸짓 언어를, 나는 어두컴컴한 객석 한 귀퉁이에 앉아 적요에 함몰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안이 온통 울음바다가 됐을 때.... 나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슴속에서는 "사랑해" 사랑해" 가 일렁이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알려진 해였으니까 제법 오래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