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손녀와 스타크래프트

시인 김상훈 2008. 5. 15. 05:58
세상에, 또 졌다.
이럴 수가.... 총전적 128전 128패라니.
그것도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 손녀에게
단 한 번도 이기지를 못한다.

저그는 징그러워서 아예 손도 안 대지만
테란이고 프로토스고 붙었다 하면 깨진다.
소위 모든 종족을 다 할 수 있는 랜덤의 손녀와
나같이 한 종족으로 쩔쩔매는 것과는 급과 격이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저 어린 아이의 머리에서
그 같은 전술과 전략이 나올 수 있을까?

망한 뇬, 쬐꾀만한 뇬이 이 불쌍한 할배를....
저번 인천에 갔을 때 내 분명히 치킨을 사줬구먼.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핸펀을 누른다.
김 나는 낌새는 싹 감추곤, 평소처럼 아주 부드럽게,
아니 할배답게. 숨 고르기 하느라 숨이 더 차지만,

" 오~ 연화야, 너 정말 잘하는구나.
할배가 보니깐 너 이담에 게이머로 나서도 되겠더라.
근데 너, 누구한테나 이렇게 이기니? "

잠시 후, 저쪽에서 명료하고도 아주 간결하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핸펀을 타고 흐른다.

" 아뇨. 어떨 땐 져 줄 때도 있어요. "

헉, 아니 뭐라고?
어느 땐 져 줄 때도 있다고?
그런데, 그런데 이 할배한텐 왜 악착같이 이기는 겨~!!
너 내 손자 맞아?
열리는 뚜껑 휘딱 열었다 도로 닫으며
다시 넌지시 묻는다.

" 그럼, 그럼~ 사람이 져 줄 때도 있어야지.
근데 연화야 그게 어느 땐 데? "

침이 꼴깍, 넘어간다.

" 오빠들이 나 뭐 사줄 때랑요.
나한테 져서 막 울 때요. "

흐미~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하구만.
그럼 나는 뭐야.
망한뇬.... 피자에 치킨에
장난감이며 용돈까지 주는 이 할배는 뭐냐고.
그렇다고 할배가 돼서 흑흑, 할 수도 없고.
음.... 한 번은 꼭 이기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잔머리 굴린다고 머리에서 김이 더 난다.
에라, 모르겠다.

" 너 혹시 뭐 살 거 없니? "
" 왜요, 사 주시게요? "
" 응~ 아니 뭐, 니가 컴터하니까 혹시 해서.... "

잠시 뜸들이더니

" 할부지~~ 있긴 있어요. 근데 비싸요. "

비싸다는 말에 나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미 뱉어낸 말이라 할아버지 체면상 그대로 밀어부친다.

" 까이 꺼, 얼마나 하겠니. 내 사줄게. 사주고 말고~! "
" 와아~ 우리 할부지 최고~~!! "

며칠 전에 나눈 막내 외손녀와의 대화다.
그리고 오늘 아침 편지함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아주 큼직큼직한 글씨로
종과 횡이 엉망인 필력의 편지 한 통이 꽂혀 있었다.
무슨 게임기 명칭 같은데 내용이 딱 세 줄이다.

닌텐도 DS 예요.
저 살 2Kg 뺐어요.
할부지 고맙습니다.----

큭-, 그게 2kg 뺀 거라니.
도대체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는 거야?
그 정도야 밥 한 끼 안 먹으면 그게 그건데.

딴엔 멋을 부린다고 핑크빛 편지지에
귀퉁이마다 앙증맞은 스티커 그림을 정성스럽게 붙였다.
내용보다 종이만 너무 커서 여백이 엄청 많은....

일을 끝내고 드디어 저녁에 한 판 붙었다.
봐주는 표시가 역력한데도 나는 또 깨졌다.
129전 129패.... 못살아.....
나는 이놈에게 지는 것이 또 있다.
바둑이다.
10급인 나는 고뇬한테 넉 점을 깔고도 팡팡 진다.

우습게도, 커서 대통령이 되겠단다.
초등 1년생 여자아이 치고는 포부가 참 생뚱맞다.
무슨 영문인지 그놈은 나만 좋아한다.
심지어 언젠가 심하게 앓아 누웠을 때도
밤새도록 할부지만 찾았다고 한다.
어느 땐 턱을 괴고 엎드려서
CD로 구워낸 내 노래를 끝까지 듣는다고 한다.

커서 뭐가 돼든 운명의 대의에 맡기고
나는 그저 그 아이가 무탈하게 성장하여
훌륭한 여성보다는
좋은 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