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의 낡은 수첩
안톤 체홉氏에게
시인 김상훈
2007. 7. 10. 04:50
한 달 보름간, 백 년 전의 시공간에서 살았다.
어느 한적한 호숫가에서 태어나
갈매기처럼 자유롭고 행복했던 소녀를 만났다.
내 생애에 가장 신선했던 그 소녀는
보름동안 내내 나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 여자였다.
무대 세트라곤 달랑 둑길 하나가 전부였지만
안톤 체홉 선생께 우리는 동의를 얻고 관객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을로 빠져나가는 뒷길,
집필을 하던 나의 작은 공간,
호숫가와 달빛, 낚시터와 드넓은 산야....
서 있는 곳과 갈등의 장소가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고
배우들은 네모난 성냥 곽 같은 무대 안에서
관객의 상상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백 년 전의 사람들로 돌아갔다.
자, 이제 연극은 모두 끝났습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마지막 나의 대사가 끝난 뒤,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들리고
잠시 후, 텅 비워진 무대와 객석은
까닭모를 허허로움과 쓸쓸함을 안겨다줬다.
또 한 번의 통과의례를 경험했다.
폐허가 된 무대를 보고 사라져간 소리와 몸짓을 떠올려본다.
분장실에서 우리는 모두 그렁그렁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초보시절의 광대도 아닌데 어인 눈물일까.
나의 삶에 버금가는 소중한 시간,
내 생에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몸짓,
내 생에 다시는 들어볼 수 없는 소리,
그러나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현란한 애증이여....
밤새도록 포장마차는 북적거렸다.
*---- 공연을 마치고....